무정 - 004장

형식은 김장로 집에서 나와서 바로 교동 자기 객주로 돌아왔다. 마치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다만 일년 넘어 다니던 습관으로 집에 왔다. 말하자면 형식이가 온 것이 아니요, 형식의 발이 형식을 끌고 온 모양이라.
주인 노파가 저녁상을 차리다가 치마로 손을 씻으면서,
“이선생 웬일이시오” 하고 이상하게 웃는다. 형식은 눈이 둥글하여지며,
“왜요.”
“아니, 그처럼 놀라실 것은 없지마는…….”
“왜 무슨 일이 생겼어요?” 하고 우뚝 서서 노파를 본다. 노파는 그 시치미떼고 놀라는 양이 우스워서 혼자 깔깔 웃더니,
“아까 석점쯤 해서 어떤 어여쁜 아가씨가 선생을 찾아오셨는데 머리는 여학생 모양으로 하였으나 아무리 보아도 기생 같습디다. 선생님도 그런 친구를 사귀는지.”
“어떤 아가씨? 기생?” 하고 형식은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구두끈을 끄르고 마루에 올라서면서,
“서울 안에는 나를 찾아올 여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아마 잘못 알고 왔던 게로구려.”
“에그, 아주 모르는 체하시지. 평양서 오신 이형식 씨라고, 똑똑히 그러던데.”
형식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앉았더니,
“암만해도 모르는 일이외다. 그래 무슨 말은 없어요……?”
“이따가 저녁에 또 온다고 하고 매우 섭섭해서 갑데다.”
“그래 나를 아노라고 그래요.”
“에그, 모르는 이를 왜 찾을꼬. 자 들어가셔서 저녁이나 잡수시고 기다리십시오. 밥맛이 달으시겠습니다.”
형식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아니한다. 과연 형식을 찾을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 장차 김선형이나 윤순애가 형식을 찾아오게 될는지는 모르거니와 지금 어느 여자가 형식을 찾으리요. 하물며 기생인 듯한 여자가. 형식은 밥상을 앞에 놓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어 좀 지나면 온다 하였으니 그때가 되면 알리라 하고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신문을 볼 즈음에 대문 밖에 찾는 사람이 있다. 노파가, “이것 보시오” 하고 눈을 꿈적하고 나간다. “이선생 돌아오셨어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노파의 뒤를 따라 어떤 젊은 여자가 들어온다. 아까 노파의 말과 같이 모시 치마 저고리에 머리도 여학생 모양으로 쪽쪘다. 형식도 말이 없고 여자도 말이 없고 노파도 어인 영문을 모르고 우두커니 섰다. 여자가 잠깐 형식을 보더니, 노파더러,
“이선생께서 계셔요?”
“저 어른이 이선생이시외다” 하고 노파도 매우 수상해한다.
“녜, 내가 이형식이오. 누구시오니까.”
여자는 깜짝 놀라는 듯이 몸을 흠칫하고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폭 숙인다. 해가 벌써 넘어가고 집집 광명등이 반작반작 눈을 뜬다. 형식은 무슨 까닭이 있음을 알고, 얼른 일어나 램프에 불을 켜고 마루에 담요를 내어 깐 뒤에,
“아무려나 이리 올라오십시오. 아까도 오셨더라는데 마침 집에 없어서 실례하였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저 같은 계집이 찾아와 선생님의 명예에 상관이 아니 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우선 올라오십시오. 무슨 일이신지…….”
여자는 은근하게 예하고 올라온다. 데리고 온 계집아이도 올라앉는다. 형식도 앉았다. 노파는 건넌방에서 불도 아니 켜고 담배를 피우면서 이 광경을 본다.
형식은 불빛에 파래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이윽히 보더니, 무슨 생각나는 일이 있는지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감는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글쎄올시다. 얼굴이 혹 뵈온 듯도 합니다마는.”
“박응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에? 박응진?” 하고 형식은 눈이 둥글하고 말이 막힌다. 여자도 그만 책상 위에 쓰러져 운다. 형식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형식은 비창한 목소리로,
“아아, 영채 씨로구려. 영채 씨로구려. 고맙소이다. 나같이 은혜 모르는 놈을 찾아 주시기 고맙소이다. 아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고 여자의 흑흑 느끼는 소리뿐이로다. 따라온 계집아이도 주인의 손에 매어달려 운다.

무정 - 00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