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019장

형식은 궐련을 피워 물고 김종렬과 이희경 두 학생을 웃는 낯으로 대한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이 두 학생이 찾아왔는지는 모르거니와 김종렬, 이희경 양인이 함께 온 것을 보니 학생 전체에 관한 일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사년급 전체에 관한 일인 줄은 알았다. 대개 전부터 학생 전체에 관한 일이거나, 사년급 전체에 관한 일에는 이 두 사람이 흔히 총대가 됨을 앎이다. 원 격식으로 말하면 최상급의 반장인 이희경이가 으레 그 총대가 될 것이로되, 이희경은 아직 나이 어리고 또 김종렬과 같이 얼굴(일을) 좋아하는 마음과 일을 잘 처리하는 수단이 없으므로 항상 김종렬의 절제를 받는다. 혹 이희경이가 갈 일에도 김종렬은 마치 어린것을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이 아니 놓이는 듯이, 반드시 희경의 뒤를 따라가고, 따라가서는 이 희경이가 두어 마디 말도 하기 전에 자기가 가로맡아 말을 하고 이희경은 도리어 따라온 사람 모양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방긋방긋 웃고만 있을 뿐이다. 이희경은 이렇게 김종렬에게 권리의 침해를 받으면서도 처음은 자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듯하여 불쾌한 생각도 있었으며(있었으나) 점점 습관이 되매, 도리어 김종렬이가 자기의 할일을 가로맡아 하여 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더러, 혹 자기가 공부가 분주하거나 일하기가 싫은 때에는 자기가 김종렬을 찾아가서 자기의 맡은 일을 위탁하기조차 한다. 그리하면 김종렬은 즉시 승낙하고 저 볼일도 내어놓고 알선한다. 이러한 때마다 이희경은 혼자 웃었다. 이번에 형식을 찾아온 일도 아마 명의상으로는 이희경이가 대표요, 김종렬은 수행원인 줄을 형식은 알았다. 그러고 정작 대표자는 상긋상긋 웃고만 앉았고 수행원인 김종렬이가 입을 열어, ‘저희가 오늘 선생을 찾은 것은’ 함이 하도 우스워서 형식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고 김종렬 같은 사람도 사회에 쓸 곳이 많다 하였다. 저런 사람은 아무 재능도 없으되, 오직 무슨 일이나 하기 좋아하는 성미가 있으므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실행하기에 편리하리라 하였다. 김종렬 같은 사람은 조고마한 일을 맡길 때에도 그것을 큰일인 듯이 말하고, 조고마한 성공을 하거든 그것이 큰 성공인 듯이, 사회에 큰 이익이 있는 성공인 듯이 말하고, ‘노형이 아니면 이 일을 할 수가 없소’ 하여 주기만 하면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러한 일이나 맡으리라 하였다. 지금 자기가 자기보다 유치하게 보고 철없게 보는 이희경이가 얼마가 아니하여 자기를 부리는 사람이 되고, 자기보다 세상에 더 공경받는 사람이 될 것이언마는 김종렬은 그런 줄을 모르나니 그런 줄을 모르는 것이 김종렬에게는 행복이라 하였다.
또 학생들이 무슨 일을 의논하여 김종렬을 내어세웠는고 하고 형식은 지극히 은근하게,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녜, 학교에 중대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종렬은 이렇게 조고마한 일에도 법률상, 정치상 술어를 쓰기를 좋아하며 또 다른 것을 외우는 재주는 없으되, 자기의 유일한 숭배 인물인 나폴레옹의 이름이 보나파르트인 줄도 외우지 못하되, 법률상 정치상의 술어는 용하게 잘 외운다. 한번 들으면 반드시 실제에 응용을 하나니, 혹 잘못 응용하는 때도 있거니와 열에 네다섯은 옳게 응용한다. 이번 형식에게 ‘중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것 같은 것은 적당하게 응용한 일례라. 형식은,
“녜, 무슨 중대사건이오?”
“저희는 삼사년급이 합하여 동맹 퇴학을 하려 합니다. 학교의 학생에게 대한 처분 권리를 불만족히 여겨서 이렇게 동맹을 체결한 것이올시다” 하고 동맹 퇴학 청원서를 낸다. 김종렬은 그만 말 두 마디를 잘못 적용하였다. ‘처분 권리’의 ‘권리’는 연문이요, ‘동맹을 체결한다’는 ‘체결’은 너무 굉장하다 하였다. 그러나 한 발이나 되는 퇴학 청원서에 이백여 명이 연명 날인한 것을 보고 형식은 놀랐다. 과연 ‘중대사건’이요, 굉장하게 ‘동맹을 체결하였구나’ 하였다. 김종렬은 퇴학 청원서를 내어 형식을 주며 자기도 형식의 곁으로 가까이 자리를 옮겨 그 글을 낭독하려는 모양을 보인다. 형식은 너무 김종렬의 예절답지 못한 데 불쾌한 생각이 나서 얼른 퇴학 청원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기 혼자만 소리 없이 읽었다. 김종렬이가 또 형식의 책상머리로 따라가려는 것을 이희경이가 웃으며 잡아당기어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나 김종렬은 이 뜻은 못 알아보고, ‘왜 버릇없이’ 하고 이희경을 흘겨보았다. 이희경은 얼굴이 발개지며 고개를 돌리고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듯 웃었다. 김종렬은 마침내 책상 맞은편에 가서 형식과 마주앉았다. 형식은 또 돌아앉으려다가 차마 그러지도 못하여 청원서를 도로 내어주며,
“종렬군, 그러나 이것은 좋지 못한 일이외다. 무슨 이유를 물론하고 학생의 학교에 대한 스트라이크는 좋지 못한 일이외다” 하였다.
김종렬은 스트라이크라는 말의 뜻은 자세히 모르거니와 베이스볼에 스트라이크란 말이 있음을 보건댄, 대체 학교를 공격하는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청원서를 접으며 장중한 목소리로,
“아니올시다. 저의 모교 당국은 부패지극(腐敗之極)에 달하였습니다. 차제(此際)를 당하여 저희 용감한 청년들이 일대 혁명을 아니 일으키면 오히려 모교는 멸망할 것이올시다” 하고 결심의 굳음이 말에 보인다. 형식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이희경을 돌아보며,
“희경군도 의견이 그렇소?”
“녜, 어저께 하학 후에 삼사년급이 모여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래, 증거는 확실하오!”
김종렬이가 소리를 높여,
“확실하올시다. 저희 학생 중에서 몇 사람이 바로 목격을 하였습니다.”
하고 주먹을 내어두르며, “증거가 확실하올시다. 그대로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한다.

무정 - 02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