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소나기가 지나갔다. 그러고 동대문과 남산 새에 곱다란 무지개의 한 부분이 형식의 방에서 보인다. 형식은 한참이나 무지개를 보고 황홀하여 앉았다 불현듯 영채를 생각하였다. 벌써 밤이 가까웠다. 영채의 위기는 일각일각이 가까워 오는 듯하다. 형식은 두루마기를 뒤쳐 입고 집에서 뛰어나왔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한참 망망하였다. 그러다가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안동을 향하고 부리나케 걸어간다. 형식은 어떤 ‘학생 기숙관’이라 하는 문 앞에 섰다. 이윽고 어떤 소년이 신을 끌고 나오더니 형식을 보고 경례한다. 형식은 소년의 손을 잡아 흔들며 묻기 어려운 듯이,
“엊그저께 학감의 뒤를 따라갔던 학생이 누구요?”
소년은 방긋이 웃으며,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상한 듯이 형식의 얼굴을 본다. 황혼의 형식의 얼굴은 하얗게 보인다.
“아니야! 희경 군. 무슨 일이 있으니 누가 학감의 뒤를 따라갔는지 좀 알려 주게.”
희경은 형식의 태도가 수상함을 보고 웃음을 그치고 이윽고 생각한다. 형식의 말소리는 떨렸더라. 희경은 마침내,
“종렬 군과 제가 갔습니다” 하고 책망을 기다리는 듯이 우향우를 하며 고개를 돌린다. 형식은 기뻐하는 목소리로,
“희경 군이 갔다 왔어요? 참 일이 잘되었소!” 한다. 희경은 더욱 형식의 태도가 이상하다 하였다. 아무리 기생 월향이가 유명하기로 설마 형식이야 월향을 탐내어 할까 함이라. 그래서 희경은 더욱 유심히 형식을 보며,
“왜 그러셔요?”
형식은 이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그러면 그 집 통호를 알겠소? 그 학감께서 가시던 집…….”
“통호수는 모릅니다.”
이 대답에 형식은 한참 낙망하더니 다시 희경의 손을 잡으며, “미안하나 내게 그 집을 좀 가르쳐 주게” 하였다.
희경은 마지못하는 듯이 들어가 모자와 두루마기를 입고 나온다. 희경은 ‘아마 학감의 일에 대하여 조사할 일이 있어 그러는가 보다’ 하고 앞서서 종로로 향하여 간다. 형식은 희경의 뒤를 따라가며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가서 어찌할까. 찾아서 설혹 영채를 만난다 하더라도 손에 ‘천 원’이 없으니 어찌할까. 만일 누가 방금 ‘천 원’을 가지고 와서 영채를 제 손에 넣는 계약을 맺는다 하더라도 ‘천 원’이 없는 나는 다만 그 곁에서 이를 갈 뿐이겠구나 하였다.
밤은 서늘하다. 종료 야시에는 ‘싸구려’ 하는 물건 파는 소리와 길다란 칼을 내어두르며 약 광고하는 소리도 들린다. 여기저기 수십 명 사람이 모여선 것은 아마 무슨 값싸고 쓰기 좋은 물건을 파는 것인 듯, 사람들은 저녁의 서늘한 맛에 취하여 아무 목적 없이 왔다갔다한다. 그 사이로 어린 학생들은 둘씩 셋씩 떼를 지어 무슨 분주한 일이나 있는 듯이 무어라고 지껄이며 사람들 사이로 뛰어다닌다. 아직도 장옷을 쓴 부인이 계집아이에게 등불을 들리고 다니는 이도 있다. 우미관에서는 무슨 소위 ‘대활극’을 하는지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가 들리고 청년회관 이층에서는 알굴리기를 하는지 쾌활하게 왔다갔다하는 청년들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앞서 가는 희경은 사람들이 모여선 곳마다 조곰씩 엿보다가는 형식의 발자취가 들리면 또 가고 가고 한다. 가물다가 비가 왔으므로 이따금 후끈후끈 흙내가 올라온다.
형식과 희경은 종각 모퉁이를 돌아 광충교로 향한다. 신용산행 전차가 커다란 눈을 부르뜨고 두 사람의 앞으로 달아난다. 두 사람은 컴컴한 다방골 천변에 들어섰다. 천변에는 섬거적을 펴고 사나이며 계집들이 섞여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웃다가 두 사람이 가까이 오면 이야기를 그치고, 컴컴한 속에서 두 사람을 쳐다본다. 두 사람이 아니 보이리만 하면 또 이야기와 웃기를 시작한다. 혹 뒤창으로 기웃기웃 엿보는 행랑 까지의(아씨의) 동백기름 번적번적하는 머리도 보인다. 희경은 가끔 길을 잊은 듯하여 우뚝 서서 사방을 돌아보다가는 그대로 가기도 하고, 혹 ‘잘못 왔습니다’ 하고 웃으며 오륙 보나 뒤로 물러 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집 문 밖에는 호로 씌운 인력거가 놓이고 인력거꾼이 그 인력거의 발등상에 걸앉아 가늘게 무슨 소리를 한다. ‘계옥’이니 ‘설매’니 하는 고운 이름을 쓴 광명등이 보이고, 혹 어디선지 모르나 ‘반나마―’ 하는 시조의 첫 구절이 떨려 나오며 그 뒤를 따라 이삼 인 남자가 함께 웃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화류촌이로구나’ 하였다. 처음 이러한 곳에 오는 형식은 이상하게 가슴이 서늘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행여 누가 보지 않는가 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남치마 입은 기생 두엇이 길 모퉁이에서 양인을 보고 ‘소곤소곤’하며 웃고 지나갈 때에 형식은 남모르게 가슴이 뛰고 얼굴이 후끈하였다. 양인은 아무 말도 없이 간다. 양인의 구두 소리가 벽에 울려 이상하게 ‘뚜벅뚜벅’ 한다. 희경은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가 마침내, “여기올시다” 하고 어떤 광명등 단 집을 가리킨다. 형식은 더욱 가슴이 서늘하며 그 대문 앞에 우뚝 서서 광명등을 보았다. ‘계월향!’
‘계월향!’ 하고 형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월향은 영채가 아니런가. 기생이 되매 이름은 고칠지언정 성조차 고쳤으랴. 그러면 월향은 영채가 아닌가. 그러면 영채는 기생이 아니 되었는가. 내가 일찍 상상하던 모양으로 우리 영채는 어떤 귀한 가정에 거둠이 되어 학교에 다니며 즐겁게 지내는가. 형식은 크게 의심하였다. 희경은 두어 걸음 비켜서서 광명등 빛에 해쓱해 보이는 형식의 얼굴을 보고 ‘무슨 근심이 있구나’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