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078장

해가 인왕산 마루턱에 걸렸다. 종로 전선대 그림자가 길게 가로누웠다. 종현 천주당 뾰족탑의 유리창이 석양을 반사하여 불길같이 번적거린다. 두부 장수의 “두부나 비지드렁” 하는 소리도 이제는 아니 들리게 되고 집집에는 앞뒷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한 손으로 땀을 씻어 가며 저녁밥을 먹는다. 북악의 황토가 가로쏘는 햇볕을 받아 빨간빛을 발하고 경복궁 어원 늙은 나무 수풀에서는 저녁 까치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종일 빨갛게 달았던 기왓장이 한강으로 불어 들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받아 뜨거운 입김을 후끈후끈하게 토한다. 길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벌겋게 되었다.
가게에 앉았던 사람들은 ‘이제는 서늘한 밤이 온다’ 하는 듯이 피곤한 얼굴에 땀을 씻으면서 행길에 나서 거닌다.
남산 솔수풀 위에 살짝 덮였던 석양도 무엇으로 지우는 듯이 점점 스러지고, 그 무성한 가지와 잎사귀 속으로 자줏빛 띤 황혼이 거미줄 모양으로 아슬랑아슬랑 기어나온다.
해 바퀴는 인왕산 머리에서 뚝 떨어졌다. 북악산에 아직도 고깔 모양으로 석양이 남았다. 장안 만호에는 파르족족한 장막이 덮인다. 그 한끝이 늘어나서 북악산으로 덮여 올라간다. 마침내 그 고깔까지도 파랗게 물을 들이고 말았다.
강원도 바로 구름산이 떠올랐다. 그것이 처음에는 불길과 같다가 점점 식어서 거뭇거뭇하여진다. 그것이 거뭇거뭇하여짐을 따라서 장안을 덮은 장막도 점점 짙어져서 자줏빛이 되었다가 마침내 회색이 된다. 그러다가 그 속에서 조고만 전등들이 반딧불 모양으로 반작반작 눈을 뜬다. 연극장과 활동사진의 소요한 악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종로와 개천가에는 담배 붙여 물고 부채 든 산보객이 점점 많아진다. 야시를 펴놓으라고 조고마한 구루마도 끌고 오고 말뚝도 박으며 휘장도 친다.
사람들은 배가 불룩하고 몸이 서늘하여 마음이 상쾌하여진다. 낮에는 잠자고 있던 사람들도 차차 기운을 내어 말도 하고 웃기도 하게 된다.
안동 김장로의 집에는 방방에 전등이 켜 있다. 마당에는 물을 뿌려 흙냄새와 화단에 꽃향기가 섞여 들어와 즐겁게 먹고 마시는 여러 사람의 신경을 흥분케 한다. 김장로는 여덟팔자 수염을 손수건으로 (문대고) 한목사는 두 팔로 몸을 버티고 뒤로 기대었으며, 형식도 숭늉을 한입 물어 소리 안 나게 양치를 한다. 세 사람은 맛나게 또 유쾌하게 저녁을 먹었다.
다른 방에서는 부인과 선형과 순애와 계집 하인이 이 역시 맛나게 유쾌하게 저녁을 바치고 말없이 서로 보고 웃는다. 선형의 두 뺨에는 보는 사람의 신경인지 모르거니와 불그레한 빛이 도는 듯하다. 부인은 예쁜 자기 딸에게 황홀한 듯이 정신없이 선형을 마주본다. 선형은 부인을 슬쩍 보고는 순애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얘 순애야, 가서 풍금이나 타자. 아까 배운 것 잊어버리지나 않었는지.”
“응 아직 가서 풍금이나 타거라” 하고 부인이 먼저 일어선다. 선형과 순애는 풍금 놓인 방으로 간다.
선형은 등자에 올라앉으며 손으로 치맛자락을 모으고 풍금 뚜께를 열고 두어 번 건반(鍵盤)을 내려훑는다. 높은 소리로부터 낮은 소리까지, 또는 낮은 소리로부터 높은 소리까지 맑은 소리가 황혼의 공기를 가볍게 떤다. 순애는 한 팔로 풍금 머리를 짚고 우두커니 서서 오르내리는 선형의 하얀 손을 본다. 선형은 커다란 보표(譜表)를 펴고 고개를 까딱까딱 하며 한번 입으로 라라라라를 불러 보더니 첫번 누를 건(鍵)을 찾아 타기를 시작한다. 눈은 보표의 음부(音符)를 따르고, 손은 하얀 건을 따른다. 보표의 빠르고 늦음을 따라 선형의 몸짓도 빨랐다 늦었다 한다. 방 안에는 아름다운 소리가 가득 찼다. 그것이 방에서 넘쳐나서 황혼의 바람에 풍겨 마당을 건너 담을 넘어 마치 물결 모양으로 사방으로 퍼진다. 몇 사람이나 가만히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몇 사람이나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는고.
선형의 손은 곡조를 따라 스스로 오르내리고 그 몸은 손을 따라 스스로 움직여진다. 마침내 맑은 노랫소리가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뚫고 흘러나왔다.
“하늘에 둥실 뜬 저 구름아, 비를 싣고서 어디로 가느냐.”
순애도 가는 목소리로 화하여 불렀다. 형식도 이 노래를 들었다. 형식의 정신은 노랫소리로 더불어 공중에 솟아올랐다. 마치 정신에 날개가 돋아서 훨훨 구름 사이로 날아가는 듯하여 말할 수 없는 서늘한 듯도 하고 따뜻한 듯도 한 기쁨이 형식의 가슴에 가득 찼다. 김장로는 목사를 향하여,
“자, 이제는 내 방으로 가서 이야기나 합시다.”
세 사람은 일어났다.

무정 - 07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