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107장

형식은 즉시 영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전에 보았던 영채의 얼굴은 다 잊어버린 듯하여 꼭 한번 새로이 보아야만 할 것 같다. 꼭 죽은 줄 알았던 영채의 얼굴은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앞에 앉은 선형을 보매 차마 영채를 보러 갈 용기가 아니 난다. 형식은 선형의 얼굴을 보았다. 선형은 무슨 실망한 일이나 있는 듯이 반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다. 그러다가 이따금 형식을 슬쩍 보고는 불쾌한 듯이 도로 눈을 감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기도 한다. 선형의 눈과 형식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형식의 몸에는 후끈후끈하는 기운이 돈다.
같은 차실에 있는 승객들은 대개 잠이 들었다. 형식도 뒤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고 아무 생각도 아니 하리라 하는 듯이 한번 몸을 흔들고 두 손을 마주잡아 배 위에 놓았다. 그러나 형식의 마음은 형식의 뜻을 좇지 아니하고 폭풍에 물결치는 바다와 같았다.
영채는 꼭 죽었어야 할 것이다. 살아 있더라도 자기가 몰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선형과 약혼이 되기 전에 만났어야 할 것이다. 약혼이 성립되고 미국을 향하고 떠나는 길에 만나게 한 것은 진실로 조물의 장난이다. 형식은 결코 영채를 버리려 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오랫동안 영채를 잊지 아니하였으며, 겸하여 다시 영채를 만날 때에는 영채에게 대한 애정이 유연히 솟아나서 속으로 영채와 혼인할 일과 혼인한 후에 즐거운 생활을 할 것과 아름다운 자녀를 낳아 이상적으로 기를 것까지 생각하였고, 또 영채가 기생인 줄을 안 뒤에는 돈 천 원을 얻지 못하여 종일 번민한 일도 있었다. 만일 영채가 평양에만 가지 아니하였던들, 죽으러 가노라는 유언만 없었던들 자기는 마땅히 영채와 일생을 같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은사(恩師)에게 대한 의리도 다하고 칠팔 년간 자기를 위하여 정절을 지켜 온 영채에게 대한 의리도 다하였을 것이다.
형식은 또 영채와 선형을 비교하여 보았다. 선형은 형식이가 일생의 처음 접한 젊은 여자요, 또 선형의 자태는 누가 보아도 황홀할 만하므로 형식에게 극히 깊고 강한 인상(印象)을 주었다. 그래서 처음 젊은 여자를 접하여 보는 젊은 남자가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형식은 선형을 세상에 다시 없는 여자로 여겼다. 다만 그 외모가 아름다울 뿐더러 그 정신까지도 외모와 같이 아름다우리라 하였다. 형식은 선형을 대하여 본 첫날에 선형에게 여자에 관한 모든 아름다운 덕을 붙였다. 선형은 형식의 눈에는 더할 수 없이 완전하고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렇게 강한 인상을 얻은 그날 저녁에 다시 영채를 보았다. 영채의 외모도 물론 아름다웠다. 공평한 눈으로 보건대 영채의 얼굴이 차라리 선형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형을 천하 제일로 확신한 형식은 영채를 제이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선형은 부귀한 집 딸로서 완전한 교육을 받은 자요, 영채는 그 동안 어떻게 굴러다녔는지 모르는 계집이라. 이 모든 것이 합하여 형식에게는, 영채는 암만해도 선형과 평등으로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다만 선형은 자기의 힘에 미치지 못할 달 속에 계수나무 가지요, 영채는 자기가 꺾으려면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매화 가지였다. 그러므로 형식이가 제일로 생각한 선형을 버리고 제이로 생각하는 영채를 취하려 하였던 것이라. 그러다가 영채가 대동강에 빠지고, 게다가 김장로가 혼인을 청하매 형식은 별로 주저함도 없이 약혼을 허하였고 또 슬퍼함도 없이 영채를 잊어버리려 하였던 것이다.
형식은 선형에게 대하여서나 영채에 대하여서나 아직 참된 사랑을 가져 보지 못하였다. 대개 형식의 사랑은 아직도 외모의 사랑이었다. 형식은 선형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선형의 성격(性格)은 한 땀도 몰랐다. 선형이가 냉정한 이지적 인물(理智的 人物)인지 또는 열렬한 정적 인물인지, 그의 성벽이 어떠하며 기호(嗜好)가 어떠한지, 그의 장처(長處)가 무엇이며 단처(短處)가 무엇인지, 또는 그와 자기와 어떤 점에서 서로 일치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 모순(矛盾)하는지, 따라서 그의 성격과 재능이 장차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될는지도 모르고 그저 맹목적(盲目的)으로 사랑한 것이라. 그의 사랑은 아직 진화(進化)를 지나지 못한 원시적(原始的) 사랑이었다. 마치 어린애끼리 서로 정이 들어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과 같은 사랑이요, 또는 아직 문명하지 못한 민족들이 다만 고운 얼굴만 보고 곧 사랑이 생기는 것과 같은 사랑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다름이 있다 하면 문명치 못한 민족의 사랑은 곧 육욕(肉慾)을 의미하되 형식의 사랑에는 정신적 분자(精神的 分子)가 많았을 뿐이다. 그러니 형식은 다만 정신적 사랑이라는 이름만 알고 그 내용을 알지 못하였었다. 진정한 사랑은 피차에 정신적으로 서로 이해(理解)하는 데서 나오는 줄을 몰랐다. 형식의 사랑은 실로 낡은 시대, 자각 없는 시대에서 새 시대, 자각 있는 대로 옮아가려는 과도기(過渡期)의 청년――조선 청년――이 흔히 가지는 사랑이다. 자기의 사랑이 이러한 사랑인 줄을 깨닫는다 하면 형식의 전도에는 대변동이 일어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는 형식에게는 지나간 한 달 동안에 행하여 온 일이 현미경으로 보는 것같이 분명히 떠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