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124장

일동의 정신은 긴장하였다. 더구나 영채는 아직도 이러한 큰 문제를 논란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어떻게 하면 저들을 구제하나?’ 함은 참 큰 문제였다. 이러한 큰 문제를 논란하는 형식과 병욱은 매우 큰 사람같이 보였다. 영채는 두자미며, 소동파의 세상을 근심하는 시구를 생각하고, 또 오 년 전 월화와 함께 대성학교장의 연설을 듣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때에는 아직 나이 어려서 찌찌(분명히) 알아듣지는 못하였거니와 “여러분의 조상은 결코 여러분과 같이 못생기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할 때에 과연 지금 날마다 만나는 사람은 못생긴 사람들이다 하던 생각이 난다. 영채는 그 말과 형식의 말에 공통한 점이 있는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한번 더 형식을 보았다. 형식은, “옳습니다. 교육으로, 실행으로 저들을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누가 하나요?” 하고 형식은 입을 꼭 다문다. 세 처녀는 몸에 소름이 끼친다. 형식은 한번 더 힘있게,
“그것을 누가 하나요?” 하고 세 처녀를 골고루 본다. 세 처녀는 아직도 경험하여 보지 못한 듯한 말할 수 없는 정신의 감동을 깨달았다. 그러고 일시에 소름이 쪽 끼쳤다. 형식은 한번 더,
“그것을 누가 하나요?” 하였다.
“우리가 하지요!” 하는 대답이 기약하지 아니하고 세 처녀의 입에서 떨어진다. 네 사람의 눈앞에는 불길이 번쩍하는 듯하였다. 마치 큰 지진이 있어서 온 땅이 떨리는 듯하였다. 형식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앉았더니,
“옳습니다. 우리가 해야지요! 우리가 공부하러 가는 뜻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차를 타고 가는 돈이며 가서 공부할 학비를 누가 주나요? 조선이 주는 것입니다. 왜? 가서 힘을 얻어 오라고, 지식을 얻어 오라고, 문명을 얻어 오라고…… 그리해서 새로운 문명 위에 튼튼한 생활의 기초를 세워 달라고…… 이러한 뜻이 아닙니까” 하고 조끼 호주머니에서 돈지갑을 내어 푸른 차표를 내어 들면서,
“이 차표 속에는 저기서 들들 떠는 저 사람들…… 아까 그 젊은 사람의 땀도 몇 방울 들었어요! 부대 다시는 이러한 불쌍한 경우를 당하지 말게 하여 달라고요?” 하고 형식은 새로 결심하는 듯이 한번 몸과 고개를 흔든다. 세 처녀도 그와 같이 몸을 흔들었다.
이때에 네 사람의 가슴속에는 꼭 같은 ‘나 할 일’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너와 나라는 차별이 없이 온통 한몸, 한마음이 된 듯하였다.
선형도 아까 영채가 “제 물 끓여 올게요” 하고 자기의 손목을 잡아 앉힐 때부터 차차 영채가 정다운 생각이 나고 또 영채가 지은 노래를 셋이 합창할 때에는 영채의 손을 잡아 주도록 정다운 생각이 나고, 또 지금 세 사람이 일제히 “우리지요!” 할 때에 더욱 영채가 정답게 되었다. 그러고 형식이가 지금 병욱과 문답할 때에는 그 얼굴에 일종 거룩하고 엄숙한 기운이 보여 지금껏 자기가 그에게 대하여 하여 오던 생각이 죄송한 듯하다. 자기는 언제까지 형식과 영채를 같이 사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이 형식과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
형식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우리가 늙어 죽게 될 때에는 기어이 이보다 훨씬 좋은 조선을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게으르고 힘없던 우리 조상을 원하는(원통히 여기는) 것을 생각하여 우리는 우리 자손에게 고마운 조상이라는 말을 듣게 합시다” 하고 웃으며, “그런데, 이 자리에서 우리가 장래 나갈 길이나 서로 말합시다” 하고 세 사람을 본다. 세 사람도 그제야 엄숙하던 얼굴이 풀리고 방그레 웃는다.
“선형(선생)께서 먼저 말씀하셔요!” 하고 병욱이가 권할 때에 문 밖에서,
“들어가도 관계치 않습니까?” 하고 우선의 목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우선의 손을 잡으면서,
“어떻게 지금 오나?”
우선은 세 사람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뒤에 형식의 곁에 앉으며,
“사(社)에서 삼랑진 근방에 물구경을 하고 오라고 전보를 했데그려” 하고 손으로 턱을 한번 쓴다. 영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나?”
“정거장에 와서 다 들었네” 하고 여자들에게 절을 하며, “참 감사합니다. 지금 정거장에서는 칭찬이 비 오듯 합니다. 어 과연 상쾌하외다” 하고 정거장에서 들은 말을 대개 한 뒤에 형식더러,
“오늘 일을 신문에 내도 좋겠지?”
형식은 대답 없이 병욱을 보다가,
“무론 관계치 않겠지요!” 한다.
“아이구, 그것은 내서 무엇 합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저 같은 놈도 큰 감동을 받았는데…… 참 말만 듣고도 눈물이 흐를 뻔하였습니다” 한다. 과연 정거장에서 어떤 승객에게 그 말을 들을 때에 우선은 지극히 감동한 바 되었다. 원래 호활한 우선이가 그처럼 눈물이 흐르도록 감동되기는 영채가 죽으러 간 때와 이번뿐이었었다. 우선은 정거장에서부터 병욱 일파를 만나면 기어이 하려던 말이 있었다. 그래서 하인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지금 무슨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하고 자기의 말할 기회를 얻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