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094장

부자간에 의견이 합하지 않는 것은 견디기도 하려니와, 내외간에 애정이 합하지 않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상관없는 남의 일이언마는 다만 십여 일이라도 같이 있는 정리라, 영채에게는 이것도 걱정이 된다. 영채의 생각에는 될 수만 있으면 이 내외를 정답게 하여 주고 싶다. 영채에게는 그 부인이나 남편이 다 같이 정답게 보인다. 오래 교제를 하여 볼수록 그 부인이 마음에 들어 이제는 진정으로 (형님이라 부르고 싶다. 이전 월화에게) 대한 정과 비슷한 애정이 솟아오른다. 무론 월화에 대한 것과 같이 존경하고 의탁하는 생각은 없으나 한껏 사랑스럽고 한껏 불쌍한 생각이 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부인의 곁에 있어서 이야기 동무도 하여 주고, 기회만 있으면 위로도 하여 준다. 부인도 이제는 영채와 친하여서 여러 가지로 속에 있는 생각을 말한다. 병욱은 다정하면서도 얼마큼 뻑뻑한 맛이 있거니와 영채는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맛이 있었다. 그래서 부인은 영채와 말하기를 유일의 낙으로 알았다. 차라리 어떤 점으로는 시누이보다도 영채가 더 정답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영채의 손을 꼭 쥐며, “아이구, 어쩌면 좋소” 하기까지 한다.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영채의 생각이라. 영채는 웬일인지 모르게 그 부인의 남편 되는 이에게 대하여 일종 정다운 생각이 난다. 처음에는 친구의 오빠인 까닭이라 하였으나 차차 더 격렬하게 그의 모양이 생각이 나고, 그의 모양이 번뜻 보일 때마다 문득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얼굴이 뻘개진다. 영채가 보기에 그도 자기를 다정한 눈으로 보는 듯하다. 영채는 암만 그것을 억제하려 하건마는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리에 누워도 그의 좀 넓적한 얼굴이 눈에 보여서 도무지 잘 수가 없다. 그러할 때마다 곁에 누운 부인을 안으면 부인도 영채를 안아 준다. 영채는 부인에게 대하여 미안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다. 어서 이 집을 떠나야 하겠다 하면서, 또한 차마 떠나기가 싫기도 하다. 그래서 영채에게는 또 한 가지 새 괴로움이 생겼다. 요사이 영채는 흔히 멀거니 무슨 생각을 하다가, “왜 그렇게 멀거니 앉았어요?” 하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이로부터 영채는 차차 남자가 그리워진다. 전부터 외롭게 적막하게 지내 왔거니와, 지금은 그 외로움과 그 적막과는 유다른 적막이 더 굳세게 영채의 가슴을 누른다. 이전에는 넓은 천지에 저 혼자만 있는 듯한 적막이더니 지금은 제 몸이 반편인 듯한 적막이로다. 다른 반편이 있어야 제 몸은 온전하여질 것 같다. 공연히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얼굴이 훗훗하여진다. 피곤한 듯도 하고, 술취한 듯도 하다. 무엇에 기대고 싶고 누구에게 안기고 싶다.
영채는 가만히 앉아서 이때껏 접하여 오던 여러 남자를 생각하여 본다. 자기의 손목을 잡아 끌던 사람, 겨드랑으로 손을 넣어 끌어안던 사람, 억지로 뺨을 대던 사람, 음란한 눈으로 자기를 유혹하며 교만한 말로 자기를 위협도 하던 사람. 그때에는 그렇게 원수스럽고 미워 보이던 남자들조차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따뜻한 감각을 준다. 남자의 살이 자기의 살에 와 닿던 감각이 자릿자릿하게 새로워진다. 지금 내 곁에 남자가 하나 있었으면 작히 좋으랴. 누구든지 손을 달라면 손을 주고 안아 준다면 안기고 싶다.
영채는 신우선을 생각하고 이형식을 생각한다. 여러 해 동안 접하여 오던 남자 중에 신우선은 가장 영채의 마음을 끌던 사람이다. 그는 풍채가 좋고, 쾌활한 기상이 좋고, 어디까지 모르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어떤 날 저녁에 둘이 마주앉아서 우선이가 영채를 달랠 때에 영채의 마음도 아니 움직임도 아니었다. 당장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때에 영채는 온전히 몸과 마음을 형식에게 바친 줄로 자신하였으므로 이를 갈고 억제하였다. 실로 그 동안 영채는 다른 남자의 모양이 생각에만 떠나와도 큰 죄로 여겨서 제 살을 꼬집어 억제하였다. 이러므로 지금껏 영채는 독립한 사람이 아니요, 어떤 도덕률(道德律)의 한 모형(模型)에 지나지 못하였다.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고 그 속에 들어 엎디인 모양으로, 영채도 알 수 없는 정절이라는 집을 짓고 그 속을 자기 세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사건에 그 집이 다 깨어지고 영채는 비로소 넓은 세상에 뛰어나왔다. 더구나 기차 속에서 병욱을 만나며 자기가 지금껏 유일한 세상으로 알아 오던 세상이 기실 보잘것없는 허깨비에 지나지 못하는 것과, 인생에는 자유롭고 즐거운 넓은 세상이 있는 것을 깨닫고, 이에 비로소 영채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젊은 사람이 되고, 젊고 어여쁜 여자가 된 것이라. 영채의 가슴에는 이제야 비로소 사람의 피가 끓기 시작하고 사람의 정이 타기를 시작한다. 영채는 자기의 마음이 전혀 변하여진 것을 생각한다. 마치 나서부터 어둡고 좁은 옥 속에서 지내다가 처음 햇빛 있고, 바람 불고, 꽃 피고, 새 우는 세상에 나온 것 같다. 영채는 거문고를 타고 바이올린을 울린다. 그러나 그 소리가 모두 다 새로운 빛을 띤다. 그러고 영채의 눈에는 기쁨과 슬픔이 섞인 듯한 눈물이 핑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