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095장

형식은 꿈같이 기쁘게 지낸다. 날마다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다 가르치고 나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선형은 이제는 낯이 익어서 부끄러워하면서도 조곰씩 농담도 한다. 그러나 순애는 여전히 웃지도 아니하고 말도 많이 하지 아니한다. 형식은 선형으로 더불어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는 우두커니 앉았는 순애를 보고는 문득 말을 그치고 미안한 듯이 슬쩍 순애를 본다. 순애는 형식의 눈을 피하려고도 아니하고 형식이야 자기를 보거나 말거나 전에 보던 데를 보고 앉았다. 이렇게 되면 형식도 말하던 흥이 깨어져서 잠자코 앉았고, 선형도 책장만 벌깍벌깍 뒤진다. 어떤 때에는 순애가 먼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형식과 선형은 가만히 순애의 뒷모양을 본다. 순애는 등이 좀 굽은 듯하고 어딘지 모르나 슬픈 빛이 보인다. 그러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는다. 웃으면서도 서로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형식은 아주 세상과 인연을 끊은 모양이 되었다. 학교는 사직하고, 학생들도 이제는 놀러 오지 아니하고, 원래 많지 않던 친구들도 근래에는 오지 아니한다. 우선도 무슨 분주한 일이 있는지 보이지 아니한다. 형식은 깨어서부터 잘 때까지 선형과 미국만 생각한다. 그래도 조곰도 적막하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더할 수 없이 기뻤다. 형식의 모든 희망은 선형과 미국에 있다. 기생집에 갔다고 남들이 시비를 하고, 돈에 팔려서 장가를 든다고 남들이 비방을 하더라도 형식이에게는 모두 우스웠다. 천하 사람이 다 자기를 미워하고 조롱하더라도 선형 한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칭찬하면 그만이다. 또 자기가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면 만인이 다 자기를 우러러보고 공경할 것이다. 장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현재를 가장 가치 있는 듯이 보려 하되,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진 형식에게는 현재는 아주 가치 없는 것이라. 자기가 경성학교에서 교사 노릇 하던 것과, 그 학생들을 사랑하던 것과, 자기의 생활과 사업에 의미가 있는 듯이 생각하던 것이 우스워 보이고 지나간 자기는 아주 가치 없는 못생긴 사람같이 보인다. 지나간 생활은 임시의 생활이요, 이제부터가 참말 자기의 생활인 것 같다. 그래서 형식의 생각에, 자기의 전도에는 오직 행복뿐이요, 아무 불행도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자기의 몸은 괴롭고 혼란한 티끌 세상을 떠나서 수천 길 높은 곳에 올라선 것 같다. 길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도 이제는 자기와는 종류가 다른 불쌍한 사람같이 보인다. 더구나 이전에는 자기의 동무로 알아 오던 주인 노파가 지극히 불쌍하게 보이고, 갑자기 더 늙고 쪼그라진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박복한 형식에게는 또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어떤 사람이 김장로에게 형식의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 말을 하였다. 하루는 장로가 불쾌한 낯빛으로 부인께,
“세상에 어디 믿을 사람 있소” 하여 이러한 회화가 있었다.
“왜요?”
“형식이가 기생집에를 다닌다구려.”
부인은 자기가 기생이매 이러한 말을 듣기가 좀 고통이 되었으나 이제는 귀부인이라, 그것을 고통으로 여길 체면이 아니라 하여 깜짝 놀라며,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뉘 말을 들으니까 형식이가 다방골 계월향이라든가 하는 기생에게 취해서 밤마다 거기 가서 파묻혀 있었다는구려. 그러다가 탑골 승방이라든가 어디서 누구누구와 그 계집 때문에 다툼이 나서 발길로 차고 때리고 야단이 났더라고요. 그뿐만 아니라, 계월향이가 형식에게 싫증이 나서 평양으로 도망하는 것을 형식이가 따라갔더라고요. 내가 그럴 리가 있느냐고 하니까 날짜까지 분명히 알고 확실히 증거까지 있다는구려” 하고 한숨을 쉬며, “얘야, 내가 일을 경솔하게 하였어.”
부인은 깜짝깜짝 놀라며 이 말을 듣더니,
“아, 누가 그래요?” 한다. 애지중지하는 딸을 그러한 사람에게 준단 말가, 하는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형식의 외모와 말하는 양을 보매 그러한 것 같지는 아니하여서,
“누가 형식을 허노라고 그러는 게지요.”
“허,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만 알았구려. 했더니 차차 들어 본즉, 그 말이 확실한 모양이외다. 우선 형식이가 평양 갔다는 날짜가 꼭 이틀 동안 우리집에 아니 오던 날이오그려. 그래서 경성학교에서도 말하면 내어쫓은 모양이라는구려.”
“에그, 저런!”
이러한 말을 하다가 마침 선형이가 들어오므로 말을 끊었다. 그러나 선형은 대강 그 말을 들었다. 그 후에 장로 부부는 다시 그런 말을 하지는 아니하였으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근심이 있었다. 선형도 왜 그런지 모르게 그 말을 듣고는 좀 불쾌하였다. 형식을 보아도 웃고 싶지를 아니하고 도리어 미운 듯한 생각이 난다. 여전히 정다운 생각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미운 생각과 의심이 난다. 선형의 가슴에는 괴로움이 생겼다. 형식은 이런 줄을 모르고 여전히 쾌활하게 지나건마는, 장로 집 식구들은 자연히 말이 적어지고 웃음이 적어지고 형식을 대할 때에 일종 불쾌하고 경멸하고 괘씸하여 하는 생각으로써 한다. 형식도 차차 이 변천을 깨닫게 되었다. 순애의 슬픈 듯한 눈은 가만히 여러 사람의 눈치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