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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006장

형식은 번개같이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눈물을 거두고 그 앞에 엎더져 우는 영채를 보았다. 그때― 십 년 전에 상긋상긋 웃으면서 어깨에도 매어달리고 손도 잡아 끌며 오빠 오빠 하던 계집아이가 벌써 이렇게 어른이 되었다. 그 동안 칠팔 년에 어떠한 풍상을 겪었나.
형식은 남자로되 지난 칠팔 년을 고생과 눈물로 지냈거든 하물며 연약한 어린 여자로 오죽 아프고 쓰렸으랴. 형식은 그 동안 지낸 일을 알고 싶어, 우는 영채의 어깨를 흔들며,
“울지 말으시오. 자, 말씀이나 들읍시다. 녜, 일어앉으세요.”
울지 말라 하는 형식이도 아니 울 수가 없거든 영채의 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자, 일어나시오.”
“녜, 자연히 눈물이 납니다그려.”
“……”
“선생을 뵈오니 돌아가신 부친님과 오라버님들을 함께 뵈온 것 같습니다” 하고 또 울며 쓰러진다. ‘돌아가신!’ 박진사 삼부자는 마침내 죽었는가. 집을 없이하고, 재산을 없이하고, 마침내 몸을 없이하였는가. 불쌍한 나를 구원하여 주던 복 있는 집 딸이 복 있던 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또 불쌍한 사람이 되었는가. 세상일을 어찌 믿으랴. 젊은 사람의 생명도 믿을 수 없거든 하물며 물거품 같은 돈과 지위랴. 박진사가 죽었다 하면 옥중에서 죽었을지니, 같은 옥중에 있으면서 아들들이나 만나 보았는가. 누가 임종에 물 한 술을 떠넣었으며, 누가 눈이나 감겼으리요. 외롭게 죽은 몸이 섬거적에 묶이어 까마귀 밥이 되단 말가. 그가 죽으매 슬퍼할 이 뉘뇨. 막막하게 북망으로 돌아갈 때에 누가 눈물을 흘렸으리요. 그가 위하여 눈물 흘리던 세상은 다시 그를 생각함이 없고, 도리어 그의 혈육을 핍박하고 회롱하도다. 하늘이 뜻이 있다 하면 무정함이 원망스럽고, 하늘이 뜻이 없다 하면 인생을 못 믿으리로다.
“돌아가시다니,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녜, 옥에 가신 지 이태 만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아버님 돌아가신 지 보름 만에 오라버니 두 분도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한 말은 알 수 없으나 옥에서는 병에 죽었다 하고 어떤 간수의 말에는, 첨에 아버님께서 굶어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맏오라버니께서 또 굶어 돌아가시고, 맏오라버니 돌아가신 날 작은오라버니는 목을 매어 돌아가셨다고 합데다” 하고 말끝에 울음이 복받쳐 나온다. 형식도 불식부지간에 소리를 내어 운다.
주인 노파는 처음에는 이형식을 후리려고 나오는 추한 계집으로만 여겼더니 차차 이야기를 들어 보니 본래 양가 여자인 듯하고, 또 신세가 가이없은지라, 자기 방에 혼자 울다가 거리에 나아가 빙수와 배를 사가지고 들어와 영채를 흔든다.
“여보, 일어나 빙수나 한잔 자시오. 좀 속이 시원하여질 테니. 이제 울으시면 어짜요? 다 팔자로 알고 참아야지. 나도 젊어서 과부 되고 다 자란 자식 죽고…… 그러고도 이렇게 사오. 부모 없는 것이 남편 없는 것에 비기면 우스운 일이랍니다. 이제 청춘에 전정이 구만리 같은데 왜 걱정을 하겠소. 자 어서 울음 그치고 빙수나 자시오. 배도 자시구” 하며 분주히 부엌에 가서 녹슨 식칼을 가져다가 배를 깎으면서,
“여봅시오, 선생께서 좀 위로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더 울으시니…….”
“가슴이 터져 오는 것을 아니 울면 어찌하오. 이가 내 사오 년간 양육받은 은인의 따님이오그려. 그런데 그 은인은 애매한 죄로 옥에서 죽고, 그의 아들 형제는 아버지를 좇아 죽고, 천지간에 은인의 혈육이라고는 이분네 하나뿐이오그려. 칠팔 년 동안이나 생사를 모르다가 이렇게 만나니 왜 슬프지를 아니하겠소.”
“슬프나 울면 어찌하나요” 하고 배를 깎아 들고 영채를 한 팔로 안아 일으키면서,
“초년 고락은 낙의 본입니다. 너무 설워 말으시고 이 배나 하나 자시오.”


영채도 친절한 말에 감격하여 눈물을 씻고 배를 받는다. 형식은 다시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보니 과연 그때의 모양이 있다. 더욱 그 큼직한 눈이 박진사를 생각게 한다. 영채도 형식의 얼굴을 본다. 얼굴이 이전보다 좀 길어진 듯하고 코 아래 수염도 났으나 전체 모양은 전과 같다 하였다. 마주보는 두 사람의 흉중에는 십여 년 전 일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휙휙 생각이 난다. 즐겁게 지내던 일, 박진사가 포박되어 갈 적에 온 집안이 통곡하던 일, 식구들은 하나씩 하나씩 다 흩어지고 수십 대 내려오던 박진사 집이 아주 망하게 되던 일, 떠나던 날 형식이가 영채를 보고, “이제는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다. 네게 오빠란 말도 다시는 못 듣겠다” 할 적에 영채가, “가지 마오. 나와 같이 갑시다” 하고 가슴에 와 안기며 울던 생각이 어제런 듯 역력하게 얼른얼른 보인다. 형식은 영채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으려 하여 묻기를 시작한다.

무정 - 00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