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무정 - 115장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무정 - 115장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무정 - 115장

형식은 결코 지금까지 장난으로 선형을 사랑한 것도 아니요, 육욕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의 동포가 사랑을 장난으로 여기고 희롱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하여 큰 불만을 품는다. 자기의 일시 정욕을 만족하기 위하여 이성을 사랑한다 함을 큰 죄악으로 여긴다. 그는 사랑이란 것을 인류의 모든 정신작용 중에 가장 중하고 거룩한 것의 하나인 줄을 믿는다. 그러므로 자기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에게 대하여서는 극히 뜻이 깊고 거룩한 일이요, 자기의 동포에게 대하여서는 큰 정신적 혁명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형식의 사랑에 대한 태도는 종교적으로 진실하고 경건(敬虔)한 것이었다. 사랑을 인생의 전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태도로 족히 인생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여 보건대 자기의 선형에게 대한 사랑은 너무 유치한 것이었다. 너무 근거가 박약하고 내용이 빈약한 것이었다.
형식은 오늘 저녁에 이것을 깨달았다. 깨달으매 슬펐다. 마치 자기가 일생 경력을 다 들여서 하여 오던 사업이 일조에 헛된 것인 줄을 깨달은 듯한 실망을 맛보았다. 그와 함께 자기의 정신의 발달한 정도가 아직도 극히 유치함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 인생을 깨달을 때도 아니요, 따라서 사랑을 의논할 때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자기가 오늘날까지 여러 학생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인생을 가르친 것이 극히 외람된 일인 줄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도 어린애다. 마침 어른 없는 사회에 처하였으므로 스스로 어른인 체하던 것인 줄을 깨달으매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도 난다.
형식은 생각에 이어 생각을 한다.
나는 조선의 나갈 길을 분명히 알았거니 하였다. 조선 사람의 품을 이상과, 따라서 교육자의 가질 이상을 확실히 잡았거니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필경은 어린애의 생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조선의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모른다. 조선의 과거를 알려면 우선 역사 보는 안식을 길러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현재를 알려면 우선 현대의 문명을 이해하고 세계의 대세를 살펴서 사회와 문명을 이해할 만한 안식을 기른 뒤에 조선의 모든 현재 상태를 주밀히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의 나갈 방향을 알려면 그 과거와 현재를 충분히 이해한 뒤에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지금껏 생각하여 오던 바, 주장하여 오던 바는 모두 다 어린애의 어린 수작이라.
더구나 나는 인생을 모른다. 내게 무슨 인생의 지식이 있는가. 나는 아직 나를 모른다. 근본적(根本的)으로 무엇인지는 설혹 알지 못한다 하여도, 적더라도 현재에 내가 세상에 처하여 갈 인생관은 있어야 할 것이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좋은 것을 좋다고 할 만한 무슨 표준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것이 있는가. 나는 과연 자각한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하매 형식은 자기의 어리석고 무식한 것이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듯하다. 형식은 눈을 떠서 선형을 본다. 선형은 여전히 가만히 앉았다. 형식은 또 생각한다.
나는 선형을 어리고 자각 없는 어린애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 보니 선형이나 자기나 다 같은 어린애다. 조상 적부터 전하여 오는 사상(思想)의 전통(傳統)은 다 잃어버리고 혼돈한 외국 사상 속에서 아직 자기네에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택할 줄 몰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는 오라비와 누이, 생활의 표준도 서지 못하고 민족의 이상도 서지 못한, 세상에 인도하는 자도 없이 내어던짐이 된 오라비와 누이――이것이 자기와 선형의 모양인 듯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다시 눈을 떠서 선형을 보매 선형은 잠이 들었는지 입을 반쯤 열고 가슴이 들먹들먹한다. 형식은 참지 못하여 무릎 위에 힘없이 놓인 선형의 손에 입을 대었다. 형식의 생각에 선형은 자기의 아내라기보다 같이 손을 끌고 길을 찾아가는 부모 잃은 누이라는 생각이 난다.
옳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배우러 간다. 네나 내나 다 어린애이므로 멀리멀리 문명한 나라로 배우러 간다. 형식은 저편 차에 있는 영채와 병욱을 생각한다. ‘불쌍한 처녀들!’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세 처녀가 다 같이 사랑스러워지고 정다워진다. 형식의 상상은 더욱 날개를 펴서 이희경 일파를 생각하고, 경성학교 학생 전체를 생각하고, 또 서울 장안 길에서 보던 누군지 얼굴도 모르고 성명도 모르는 남녀 학생들과 무수한 어린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네들이 모두 다 자기와 같이 장차 나갈 길을 부르짖어 구하는 듯하며,) 그네들이 다 자기의 형이요 동생이요 누이들인 것같이 정답게 생각된다. 형식은 마음속으로 커다란 팔을 벌려 그 어린 동생들을 한 팔에 안아 본다.
형식의 생각에 자기와 선형과, 또 병욱과 영채와 그 밖에 누군지 모르나 잘 배우려 하는 사람 몇십 명 몇백 명이 조선에 돌아오면 조선은 하루이틀 동안에 갑자기 새 조선이 될 듯이 생각한다. 그러고 아까 슬픔을 잊어버리고 혼자 빙그레 웃으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