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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021장

형식은 분해하는 김종렬을 향하여,
“그러나 그런 온당치 못한 일을 해서야 쓰겠나. 참아야지.”
“아니올시다. 벌써 삼 년 동안이나 참았습니다” 하고 기어이 배학감을 배척하고야 말려 한다. 김종렬은 말을 이어,
“이렇게 이백여 명 용감한 청년들이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이제는 일보도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주께서 허하지 아니하시면 할 수 있소?”
김종렬은 ‘교주’란 말을 듣고 얼마큼 낙심하였다. 한참 고개를 기웃기웃하고 생각하더니,
“그러니까 퇴학합지요. 경성학교가 아니면 학교가 없어요?”
“그러나 아무리 고식한 일이 있어도 동맹 퇴학은 온당치 아니하시. 또 모교를 떠나기가 어렵지 아니한가?”
“모교가 무슨 모교오니까. 이전 박선생님께서 교장으로 계시고, 윤선생님께서 학감으로 계실 때에는 모교였지마는…… 지금은 학교에 대하여 정이란 조곰도 없습니다. 교장이라는 어른은 아무것도 모르시지요…… 학감이라는 자는 기생집에만 다니지요……” 하고 김종렬의 눈에는 분한 기운이 오른다. 이희경은 ‘학감이란 자’라는 말을 듣고 김의 옆을 찌르며,
“여보, 그게 무슨 말이오?”
“어째! 그따위 학감을 무어라고!”
형식은 근심하는 빛으로,
“그러면 지금 교장 댁으로 가려 하오?”
“녜, 교장어른 가 뵈옵고, 열점쯤 해서 교주 댁으로 가렵니다. 교주는 열점이나 되어야 일어난다니까……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저희 일에 동정하십니까?”
“내가 교사의 몸이 되어 동정하고 말고를 말할 수가 없지마는 다시 생각하여서 일이 없도록 하여야지” 하고 두 청년을 돌려보냈다. 형식도 마음으로는 무론 배학감의 배척에 찬성하였다. 교실에서 무슨 말하던 끝에 혹 그 비슷한 말을 한두 번 한 적도 있었다. 사백여 명 학생과 십여 명 교원 중에 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도 없었다. 교원들도 아무쪼록 배학감과 말을 아니하려 하고 학생들도 길가에서 만나면 못 본 체하고 지나간다. 누군지 모르나 익명으로 배학감에게 학감 사직의 권고를 한 자도 있고, 혹 배학감이 맡은 역사나 지리 시간에 칠판에다가 ‘배학감을 교장으로 할사, 배학감은 천하 제일 역사 지리사라’ 하는 등 풍자하는 글을 쓰고, 혹 뒷간에다가 ‘배학감 요리점이라’ 하고 연필로 쓴 어린 글씨는 아마 일이년급 학생이 배학감에게 ‘너도 사람이냐’ 하는 책망을 받고 나와 분김에 쓴 것인 듯. 교사치고 별명 없는 이가 없거니와 배학감은 그 중에도 가장 별명이 많은 사람이라. 다른 교사의 별명은 다만 재미로 짓는 것이로되, 배학감의 별명은 미움과 원망으로 지은 것이라. 얼굴이 빨개지며 ‘너도 사람이냐’ 하는 혹독한 책망을 받은 어린 학생들은 당장은 감히 대답을 못하되, 문 밖에만 나서면 혀를 내어밀고 (제가) 특별히 (짓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남이 지어 놓은 별명을) 새 별명을 이삼 차 부르고야 얼마큼 분이 풀린다. 어린 학생들은 이 별명이라는 방법으로 혹독한 배학감에게 대한 분풀이하는 약을 삼았다. 그러므로 여러 학생이 한꺼번에 배학감에게 ‘너희도 사람이냐’ 하는 책망을 받은 때에는 일동이 한곳에 모여앉아, 마치 큰절에서 아침에 중들이 모여앉아 염불하듯이 배학감의 별명을 있는 대로 부른다. 한참이나 열이 나서 별명을 부르다가 적이 속이 시원하게 되면, “와, 와라, 후레, 라후레” 하고 모든 별명 중에 가장 (그) 경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별명을 부르고는 박장을 한다.
별명 중에 제일 유세력한 것이 셋이니, 즉 암펌, 여우 및 개다. 암펌이라 함은 혹독하다는 뜻이요, 여우라 함은 간특하다는 뜻이어니와, 개라 함은 자못 뜻이 깊다. 첫째, 배학감이 교주 김남작의 발을 핥고 똥을 먹으며 독일식 정탐견 노릇을 한다 함이니, 배학감은 아랫사람에게 대하여 혹독하게 하던 것과 달라, 자기보다 한층 높은 사람을 대하여서는 마치 오래 먹인 개가 그 주인을 보고 꼬리를 두르며 발굽을 핥는 모양으로 국궁돈수(鞠躬頓首)가 무소부지(無所不至)며, 조곰 아랫사람에게 대하여서는 일부러 몸을 뒤로 젖히고 혀가 안으로 가들어(기어)들다가도 한층 윗사람 앞에 나아가면 전신의 근육이 탁 풀어져 고개와 허리가 저절로 굽어지며 혀의 힘줄이 늘어나 말에 ‘하시옵’, ‘하옵시겠삽’ 같은 경어란 경어를 있는 대로 주워다가 바친다. 이리하여 용하게도 교주 김남작의 신용을 얻어 배명식이라면 김남작의 유일한 청년 친구라. 이리하여 배학감은 동료와 학생 간에는 지극히 비평이 나쁘되, 김남작을 머리로 하여 소위 상류계급에는 지극히 신용이 깊다. 이러므로 아무리 동료와 학생들이 배학감을 배척하여도 배학감의 지위는 반석같이 공고한 것이라. 둘째, 동료 중에 자기의 시키는 말을 듣지 아니하거나 또는 자기를 시비하는 자가 있거나, 혹 이유는 없으되 자기의 눈에 밉게 보이는 자가 있으면 곧 교주에게 품하여 이삼 일 내로 축출 명령이 내린다. 이리하여 아까 김종렬이가 사모하던 박교장과 윤교감을 내어쫓고 지금 교장과 같이 숙맥불변하는 노인을 교장으로 삼고 자기가 학감의 중임을 맡아 교내의 모든 사무를 온전히 제 마음대로 하게 된 것이라. 이리하여 학교에 있던 교사 중에 적이 마음 있는 자는 다 달아나고 다른 데 갈 데가 없다든가, 배학감의 절제를 달게 받는 사람만 남게 되어 학교는 점점 말이 못되게 되었다. 그러나 다만 형식은 동경 유학생인 까닭에 배학감도 과히 괄시를 아니하고, 또 형식도 자기까지 떠나면 학교가 말이 아니리라 하여 아직 남아 있는 것이라.
이렇게 배학감은 전교내의 배척을 받아 오던데다가 근래에는 무슨 심화가 생겼는지 다동 구리개 근방으로 부지런히 청루를 방문하는 사실이 발각되어 이번 소동이 일어난 것이라.
형식은 ‘방관할 수 없고나’ 하고 곧 학교로 갔다.

무정 - 02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