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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075장

노파의 말에 형식은 더욱 놀랐다. 과연 자기가 영채에게 대하여 무정하였던가. 과연 그때에 영채의 손을 잡으며 나도 지금껏 자기를 그리워하던 말을 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일어나 나가려 할 때에 그를 붙들고 그의 장래에 대한 결심을 물어 보아야 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그 자리에서 내가 너를 거두겠다 하고 같이 영채의 집에 가서 그 어미와 의논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였더면 영채는 그 이튿날 청량리에도 아니 갔을 것이요, 그 변도 당하지 아니하였을 것이 아니었던가. 또 청량리에서 같이 다방골로 오는 동안에도 내가 너를 거두마 할 것이 아니었던가. 다방골로 가지 말고 다른 객점이나 내 집에 데리고 올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였더면 평양으로 갈 생각도 아니하고 물에 빠져 죽지도 아니할 것이 아니었던가. 옳다, 노파의 말과 같이 영채를 죽인 것은 내다. 영채가 내 집에 온 것은, ‘나도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만났구나’ 하는 내 말을 들으려 함이다. 그러고 ‘이제부터 너는 내 아내다’ 하는 말을 들으려 함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에 무슨 생각을 하였나. 영채가 기생이나 아니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상류 가정에 거둠이 되어 여학교에나 다녔으면 좋겠다……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마음속으로는 선형이가 있는데 왜 영채가 뛰어나왔나, 영채가 기생이거나 뉘 첩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기도 하였다. 아아, 상류 가정은 무엇이며 기생은 무엇인고.
또 나는 왜 그 이튿날 아침에 일찍이 영채를 찾지 아니하였던고. 학교를 위해서? 교육가라는 명예를 위해서?
옳다, 영채를 죽인 것은 내다. 그러고 평양까지 따라 내려갔다가 영채의 시체도 찾아보지 아니하고 왔다. 칠성문 밖에서 도리어 기쁜 마음을 가지고 왔다. 밤새도록 차 속에서도 영채는 생각도 아니하고 왔다. 영채가 죽은 것이 도리어 무거운 짐이 덜리는 것 같았다.
형식은 고개를 흔들며,
“옳아요. 내가 영채를 죽였어요, 내가 죽였어요! 나를 위하여 살아오던 영채를 내 손으로 죽였어요!” 하고 몹시 괴로운 듯이 숨이 차다. 노파는 도리어 미안한 생각이 나서,
“다 제 팔자지요.”
“아니야요. 내가 죽였어요.”
이때에 우선이가 대팻밥 벙거지를 두르며 들어와 인사도 없이,
“언제 왔나, 그래 찾았나.”
형식은 우선은 보지 아니하고,
“내가 죽였네, 영채를 내가 죽였네.”
“응, 죽었어! 그 전보가 아니 갔던가.”
“내가 죽였어! 그러고서는 나는 그의 시체도 찾지 아니하고 왔네그려. 흥, 학생들 쉴까 보아서.”
“김장로의 따님이 보고 싶던 게지” 하고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도 우선은 활해를 잊지 아니한다. “대관절 어찌 되었나?”
“죽었어!” 하고 벌떡 일어나며, “자네 돈 있나. 있거든 한 오 원 꾸게” 하고 생각하니, 이제는 돈 나올 곳도 없다. 학교에서 유월 월급은 주겠지마는 찾으러 갈 수도 없고, 칠월부터는 형식에게는 아무 수입도 없다.
“돈은 해서?”
“가서 영채의 시체나 찾아야겠네. 찾아서 내가 업어다라도 장례나 지내 주어야겠네” 하고 형식은 괴로움을 못 견디어하는 듯이 마당으로 왔다갔다한다. 형식의 적삼에는 땀이 배었다. 우선은 지팡이로 엉덩이를 버티고 서서 형식을 보더니,
“벌써 다 떠내려 갔겠네. 황해바다로 둥둥 떠나갔겠네.”
“왜 그래요? 물에 빠져 죽은 송장은 사흘 전에는 그 자리에 아니 떠난답니다” 하고 노파가 우선을 보며 말한다.
“떠내려갔거든 어디까지든지 따라 내려가지. 있는 데까지 따라 내려가지.” 하고 잠깐 눈을 감고 우두커니 섰더니, 결심한 듯이 고개를 번쩍 들고 우선의 곁으로 와서 손을 내어밀며,
“어서 오 원만 내게.”
“지금 곧 떠날 터인가.”
“정거장에 나가서 차 있는 대로 떠날라네.”
우선은 마지못하여 하는 듯이 오 원짜리 지표를 내어준다. 영채가 죽었단 말을 듣고 우선도 미상불 슬펐다. 귀중히 여기던 무엇이 없어진 것 같았다.
형식은 돈을 받아 넣고, 방에 들어가 두루마기를 입고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신을) 신으려고 나섰다. 이때에 어떤 파나마를 쓴 신사가 형식을 찾는다. 형식은 이마를 찌푸리더니 마지못하여 문에 나갔다. 그는 김장로와 한 교회에 있는 목사다. 젊은 얼굴에 수염은 한 개도 없고 두 뺨에는 굵은 주름이 서너 줄 깔렸다. 정직한 듯한 중늙은이다. 우선과 노파는 노파의 방 툇마루에 가서 우두커니 두 사람을 본다. 형식은 책을 놓고 목사를 청해 올려 앉혔다.
“어디 가시는 길이오!”
“녜, 산보 나가던 길이올시다. 더운데 어떻게 이렇게…….”
“뵈온 지도 오래고…… 또 무슨 할 말씀도 좀 있어서.”
“제게요!” 하고 형식은 목사를 본다. 목사는 까닭 있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과히 바쁘시지는 않으셔요?”
“아니올시다. 말씀하시지요.”
“허허허, 이선생께서 기뻐하실 말씀이외다” 하고 또 한번 웃으며 형식의 방 안을 둘러본다. 노파와 우선은 서로 돌아보며 무엇을 수군수군한다. 오늘은 노파가 우선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모양이로다.
목사는 한참 부채질을 하더니 유심히 형식을 보며,
“다른 말씀이 아니라” 하고 말을 내기가 어려운 듯이 말을 시작한다. 듣는 형식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목사의 태도가 수상하다 하였다. 그러고 어서 말을 다 하면 정거장으로 뛰어나가리라 하였다.

무정 - 07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