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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037장

형식은 다음 번 오는 전차를 탔다. 신호수가 푸른 등을 두르니, 전차는 또 찌국 하는 소리를 내며, 구부러진 데를 돌아간다. 형식은 조민한 생각에 구리개로서 서대문 가는 전차를 잘못 탔다. 형식은 전차에서 뛰어내려서 바로 뒤대어 오는 동대문행을 잡아탔다. 형식은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의 땀을 씻었다. 차장은 형식의 차세를 받고 ‘딸랑’ 하면서 유심히 형식의 얼굴을 본다. 형식의 얼굴은 과연 몹시 붉게 되었더라. 형식은 전차 속을 한번 둘러보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형식은 전차가 일부러 속력을 뜨게 하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과연 야시에 사람이 많이 내왕하여 운전수는 연해 두 발로 종을 딸랑딸랑 울리면서 천천히 진행하더라. 형식의 가슴에는 불이 일어난다. 형식은 활동사진에서 서양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질풍같이 달아나는 양을 생각하고, 이런 때에 나도 자동차를 탔으면 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종로에서 자동차를 타고 철물교를 지나 배오개를 지나 동대문을 지나 친잠하시는 상원 앞 버들 사이를 지나 청량리를 지나 홍릉 솔숲 속으로 달려가는 것을 상상하였다. 그러고 자기가 어느 집에서 영채가 어떤 사람에게 고생을 당하는가 하고 땀을 흘리며 이집 저집으로 찾아다니는 양과, 여승들이 방글방글 웃으며 ‘모르겠습니다’ 할 때에 자기가 더욱 초조하여 하는 양을 상상하였다. 이때에 누가 형식의 어깨를 툭 치며,
“요― 어디 가는가?” 한다. 형식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신문기자 신우선이로다. 신우선은 형식의 곁에 앉아 그 대팻밥 모자로 부채질을 하며,
“그래 어떤가? 김장로의 따님이 자네를 사랑하던가?” 하고 곁에 앉은 사람이 듣는 것도 상관치 아니하는 듯이 큰소리로 말한다. 형식은 잠깐 아까 자기가 김장로 집에서 선형과 순애를 대하였던 생각을 하고 곧 우선이가 자기의 지금 가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을 생각하였다. 형식은 우선의 귀에 입을 대고,
“여보게 큰일이 났네” 하였다. 우선은 껄껄 웃으며,
“아따, 자네는 큰일도 많데, 또 무슨 큰일인가” 한다. 형식은 우선의 팔을 잡아당기어 말소리를 높이지 말라는 뜻을 표하고 다시 말을 이어 자기의 은인의 딸이 지금 기생으로 서울에 와 있는데, 그는 자기를 위하여 정절을 지켜 왔는데, 지금 여러 유력한 사람들이 그를 자기네의 손에 넣으려 하는데, 지금 청량리에서 어떤 사람에게 위협을 당하는 중인데, 지금 자기는 그를 구원하러 가는 길이라 하고 마침내,
“여보게, 자네는(자네가) 좀 도와 주어야 되겠네” 하고 말을 맺었다. 형식은 이러한 말을 할 때에 영채가 방금 어떤 남자에게 위급한 위협을 받는 양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우선은, “응, 응, 그래, 응” 하고 형식의 가늘게 하는 말을 주의하여 듣더니,
“그래, 그 이름은 무엇인가.”
“본명은 박영채인데 계월향이라고 한다네” 하고 ‘계월향’이가 과연 ‘박영채’인가 하고 의심도 하였다. 우선은 ‘계월향’이란 말을 듣고, 또 계월향이가 (형식의 은인의 따님이란 월향이가)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선은 눈이 둥글하여지며,
“여보게, 그게 참말인가?” 하고 형식의 얼굴을 보았다. 형식은 조민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하는 듯 숨소리가 커지며,
“참말일세, 참말이어!” 하고 영채가 어젯저녁에 자기를 찾아왔단 말과 자기를 찾아와서 신세 타령을 하던 말과, 자기가 방금 다방골 월향의 집으로 다녀온다는 말을 하고 다시,
“그런데 나를 좀 도와 주게” 한다. “도오다이몬 슈텐(동대문 종점)! 동대문이올시다” 하는 차장의 소리에, 두 사람은 말을 끊고 전차에서 내렸다. 아직도 청량리 가는 전차가 오지 아니하였다.
우선이가 형식의 말을 듣고 놀란 것은 까닭이 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우선이도 계월향을 처음 보고 그만 정신을 잃은 여러 사람 중의 하나이라. 우선은 백에 하나도 쉽지 아니한 호남자였다. 풍채는 좋겠다, 구변이 있겠다, 나이는 불과 이십오륙 세로되, 문여시(文與詩)를 깨끗이 하겠다, 원래 서울에 똑똑한 집 자손으로 부귀한 집 자제들과 친분이 있겠다, 게다가 당시 서슬이 푸른 대신문에 기자였다. 이러므로 그는 계집을 후리는 데는 갖은 능력과 자격이 구비하였었다. 그는 여러 기생을 상종하였고, 또 연극장의 차리는 방〔樂屋〕에 출입하여 삼패며 광대도 희롱하였었다. 이렇게 말하면 신우선이란 사람은 계집 궁둥이나 따라다니는 망가자와 같이 들리되, 그에게는 시인의 아량이 있고 신사의 풍채가 있고 정성이 있고 의리가 있었다. 그의 친구는 그의 방탕함을 책망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재주와 쾌활한 기상을 사랑하였다. ‘신우선은 지나 소설에 뛰어나오는 풍류 남자라’ 함은 형식의 그를 평한 말이니, 과연 그는 소주, 항주 근방에 당나라 시절 호협한 청년의 풍이 있었다.
신우선이가 계월향에게 마음을 둔 것은 한 달쯤 전이었다. 우선은 자기의 힘을 믿으매 월향도 으레 자기의 손에 들려니 하였다. 월향이가 여러 부호가 자제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일생을 의탁할 만한 영웅 재자를 구함이라 하고, 자기는 족히 그 후보자가 되리라 하였다. 그래서 우선은 남들이 돈과 육욕으로 월향을 달랠 때에, 자기는 인물과 재주와 기상으로 월향을 달래리라 하였다. 무론 우선은 돈으로 경쟁할 만한 힘은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밤마다 시를 지어 혹은 우편으로 혹은 직접 월향에게 주었다. 이러노라면 월향은 자기의 인격과 천재를 알아보고 ‘이제야 내 배필을 만났구나’ 하면서 두 팔을 벌리고 자기에게 안기려니 하였다. 그러하던 즈음에 형식에게서 이러한 말을 들으니 놀라는 것도 마땅하다.

무정 - 03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