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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008장

“그렇게 때리고 맞고 하는 즈음에 이웃에 사는 계집 하나가 와서, ‘저 주막에 있는 갈보가 웬 커다란 은가락지를 꼈습데다. 어디서 났는가 하고 물어 보니까 기와집 새서방이 주더랍데다그려. 새서방님이 요새 자주 다니는가 보더구먼’ 합데다. 이래서 저는 누명을 벗었으나, 그 다음에 오라버니댁과 그 계집과 대판 싸움이 납데다. ‘이년, 서방 있는 년이 남의 어린 사람을 후려다가 끼고 자고, 가락지도 네가 가져오라고 했지 이년’ 하면, ‘제 자식을 잘 가르칠 게지. 남의 탓을 왜’ 이 모양으로 다툽데다.”
“어린것을 가르칠 줄은 모르고 장가만 일찍 들여서 못된 버릇만 배우게 하니.”
하고 형식이가 탄식한다.
“그래서 이선생께서는 장가도 아니 들으시는게구먼.”
영채는 형식이가 일찍 취처 아니했단 노파의 말을 듣고 놀라서 형식을 보았다. 그러고 그 장가 아니 든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 이유가 자기에게 무슨 상관이 없는가 하였다. 이전 부친께서 농담삼아, ‘너 형식의 아내 될래’ 하던 말을 생각하였다. 그때에 어린 생각에도 형식은 참 좋은 사람이거니 하고 사랑에 와 있던 여러 사람 중에도 특별히 형식에게 정이 들었었다. 이래 칠팔 년간에 한강에 뜬 버들잎 모양으로 갖은 고락을 다 겪으며 천애지각으로 표류하면서도 일찍 형식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차차 낫살을 먹어 갈수록 형식의 얼굴이 더욱 정답게 가슴속에 떠 나오더라. 혼자 어디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형식을 생각하고 울면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몸이 팔려 기생 노릇 한 지가 이미 육칠 년에 여러 남자의 청구도 많이 받았건마는 아직 한 번도 몸을 허한 적이 없음은 어렸을 적 소학 열녀전을 배운 까닭도 되거니와, 마음속에 형식을 잊지 못한 것이 가장 큰 까닭이었다. 부친께서, ‘너는 형식의 아내가 되어라’ 하신 말씀을 자라나서 생각하니, 다만 일시 농담이 아니라 진실로 후일에 그 말씀대로 하시려 한 것이라 하고 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부친의 뜻을 아니 어기리라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살았는가 죽었는가. 살았다 하더라도 이미 유실 유가하고 생자 생녀하였으려니 하고는 혼자 절망도 하였으나, 설혹 그러하더라도 나는 일생을 형식에게 바치고 달리 남자를 보지 아니하리라고 굳게 작정하였었다. 이번 우연히 형식을 만나게 되니 기쁨은 기쁘거니와, 자기는 영원히 혼잣몸으로 지내려니 하였다. 그러다가 형식이가 아직 장가 아니 들었단 말을 들으니, 일변 놀랍기도 하고 일변 기쁘기도 하나, 다시 생각하여 보건대 형식은 지금 교육계에 다니는 사람이라, 행실과 명망이 생명이니 기생을 아내로 삼는다 하면 사회의 평론이 어떠할까 하고 다시 절망스러운 마음도 생긴다.
형식으로 말하면, 그 동안 동경에 유학하노라고 장가들 틈도 없었거니와 그 동안 구혼하는 데도 없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공부로 핑계를 삼고 아직도 구혼에 응하지 아니한 것은 중심에 영채를 생각하였음이라. 일찍 박진사가 형식을 대하여 직접으로 말한 적은 없었으나 박진사가 특별히 자기를 사랑하는 양을 보고, 또 남이 전하는 말을 들어도 박진사가 자기로 사위삼으려는 뜻이 있는 줄을 대강 짐작하였었다. 형식이가 박진사의 집을 떠날 때에 영채의 손을 잡고, ‘다시 너를 보지 못하겠다’ 한 것은 여러 가지 깊은 슬픔이 많이 있어서 한 말이라. 그러나 그 후에 영채의 소식을 알 길이 바이 없고, 또 영채의 나이 이미 과년이 된지라 응당 뉘 집 아내가 되어 혹 자녀를 낳았을는지도 모르리라 하였다. 그러하건마는 은사의 뜻을 저버리고 차마 제 몸만 위하여 달리 장가들 마음이 없고 행여나 영채의 소식을 들을까 하고 지금껏 기다리던 차이라.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만나니, 아무리 하여도 기생 노릇을 하는 모양, 그러면 벌써 여러 사람에게 몸을 더럽혔으려니, 만일 그렇다 하면 자기 아내 못 되는 것이 한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애쓰던 은인의 혈육이 이처럼 윤락하게 됨이 원통하여 아까도 슬피 소리를 내어 운 것이요, 또 그 동안 지나온 이야기를 들으려 함도 행여나 기생이나 아니 되었으면 하는 희망과 설혹 되었다 하더라도 옛사람의 본을 받아 송죽 같은 정절을 지켰으면 하는 희망이 있음이라. 이제 형식과 영채는 피차에 저편의 속을 알고 싶어하게 된 것이라.
“그래, 그 다음에 어찌 되었습니까.”


“그날 종일 밥도 아니 먹고 울다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집에 있지 못할 줄을 알고 어디로 도망할 마음이 불현듯 납데다. 도망을 하자니 열세 살이나 된 계집아이가 가기를 어디로 갑네까. 영변 고모님 댁이 있단 말을 들었으나 어디인지도 모르고, 또 고모님도 이미 돌아가셨다 하니 거기인들 외가와 다르랴. 들은즉, 아버님과 두 오라버니께서 평양에 계시다 하니 차라리 거기나 찾아가리라. 아무리 옥에 계시다 하기로 자식이야 같이 있게 아니하랴 하고 그날 밤에 도망하여 평양으로 가려고 작정하고 저녁밥을 많이 먹고 식구들이 잠들기를 기다렸습니다.”

무정 - 00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