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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113장

형식은 차마 더 영채에게 말이 나오지 아니하므로 병욱더러,
“그런데 대관절 어찌 된 일이오니까. 이전부터 영채 씨를 아셨어요?”
병욱은 형식을 보고 웃는다. 그 웃음이 형식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준다. 자기를 비웃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아니올시다. 제가 방학에 집으로 오는 길에 차 속에서 만났어요.”
형식은 눈이 둥그래지며 영채를 한번 보고 다시 병욱을 향하여,
“그러면 영채 씨가 평양 가시는 길에?”
“녜” 하고 만다. 형식은 더 알고 싶었다. 영채가 어찌하여 죽을 결심을 풀었으며, 어찌하여 동경으로 가게 된 것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래 어떻게 되었어요?”
병욱은 고개를 기울여서 영채의 돌아앉은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래서 죽기는 왜 죽는단 말이냐. 즐거운 인생을 하루라도 오래 살지 못하여 걱정인데 왜 구태 지레 죽으려느냐고 그랬지요. 그러고 지금까지는 네가 천하 사람의 조롱을 받고, 학대를 받고……” 하고는 주저하는 듯이 형식을 바라보다가 또 웃으면서, “또 일생에 생각하고 사모하던 사람에도 버림을 받았지마는……” 이 말이 끝나기 전에 형식의 가슴은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병욱은 형식의 낯빛이 변하여짐을 보고 말을 끊었다가,
“그렇게 지금토록 네 일생은 눈물과 원망의 일생이지마는 이제부터 네 앞에는 넓고 즐거운 장래가 있지 아니하냐 하고 억지로 차에서 끌어내렸지요.”
“참 감사합니다. 아씨 덕에 나도 죄가 얼마큼 가벼워진 듯합니다. 저는 꼭 영채 씨께서 돌아가신 줄만 알았어요――이때에 병욱과 영채는 속으로 흥 한다―― 그래 즉시 평양경찰서에 전보를 놓고 다음 번 차로 평양으로 내려갔지요――여기 와서 형식은 자기의 변명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 기쁘다 하는 생각이 난다―― 했더니, 경찰서에서 하는 말이 정거장에 나가서 수탐을 하여 보았지마는 알 수 없다고 하지요. 그래서 알 만한 집에도 가 물어 보고, 또 박선생 묘소에도……” 하다가, 중간에 돌아온 생각을 하매 문득 말을 그치고 고개를 숙인다. 그때에 북망산까지 가보고 대동강가로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시체를 찾아보았더면 좋을 뻔하였다 하는 생각이 난다. 병욱은 한참 듣더니,
“녜, 아마 그리하셨겠지요. 그러면 시체를 찾으시느라고 꽤 애를 쓰셨겠네.”
형식은 ‘이 계집애가 꽤 사람을 골린다’ 하였다. 과연 형식의 등에는 땀이 흘렀다.
영채는 형식의 하는 말을 다 들었다. 그러고 형식에게 대하여 원통한 듯하던 마음이 얼마큼 풀린다. 그러나 형식이가 즉시 자기의 뒤를 따라 평양으로 내려온 것과, 열심으로 자기의 시체를 찾아 준 고마움도 자기가 죽은 지 한 달이 못 하여 선형과 혼인을 하여 가지고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에 눌려 버리고 만다. 영채의 생각에는 형식 한 사람이 정다운 애인도 되고 박정한 낭군도 되어 보인다. 그러나 만사가 이미 다 지나갔으니 이제 와서 한탄하면 무엇 하고 분풀이를 하면 무엇 하랴. 차라리 웃는 낯으로 형식을 대하여 저편의 마음이나 기쁘게 하여 줌이 좋으리라 하는 생각도 난다. 그래서 마음을 좀 돌리기는 돌렸으나 그래도 아주 웃는 얼굴을 보여 형식에게 안심을 주고 싶지는 아니하여,
“참말 죄송합니다. 황주 가서 곧 편지를 드리려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 잠깐 살아 있는 것을 알려 드리면 무엇 하랴. 차라리 죽은 줄로 믿고 계시는 것이 도리어 안심이 되실 듯하기로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보면 아니 알려 드린 것이 어떻게 잘 되었는지요” 하고 영채도 과히 말하였다는 생각이 나서 웃는다.
“그러면 어찌해서 엽서 한 장도 아니 주신단 말씀이오?” 하고 형식은 분개한 구조로, “그렇게 사람을 괴롭게 하십니까?” 형식은 진실로 이 말을 듣고 영채를 원망하였다. 만일 영채가 엽서 한 장만 하였으면 자기는 마땅히 당장 영채를 찾아가서 영채의 손을 잡았을 것 같다. 병욱과 영채는 형식의 분개하여 하는 얼굴을 본다. 더구나 영채는 형식에게 대하여 불안한 생각이 나서,
“그러나 저는 제가 살아 있는 줄을 알게 하는 것이 도리어 선생께 부질없는 근심을 끼칠 줄로 알았어요. 만일 제가 선생의 몸에 누가 되어서 명예를 상한다든지 하면 도리어――주저하다가―― 선생을 위하는 도리도 아니겠고…… 그래서 억지로 참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고 또 영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형식이 영채의 하는 말을 듣다가 눈물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디까지든지 자기를 위하여 주는 영채의 심정이 더욱 감사하게 생각된다. 죽으려 한 것도 자기를 위하여,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는 줄을 알리지 아니한 것도 자기를 위하여 한 것임을 생각하매 자기의 영채에게 대한 태도의 너무 무정함이 후회된다.
마주앉은 눈물 흘리는 영채를 보고, 또 저편 차실에 앉은 선형을 생각하매 형식의 마음은 자못 산란하다. 세 사람 사이에는 한참 말이 없고 기차는 어느 철교를 건너가느라고 요란한 소리를 낸다. 창에 뿌리는 빗발과 흘러가는 물소리는 큰비가 아직 계속하는 줄을 알게 한다. 홍수나 아니 나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