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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039장

두 사람은 청량사에 다다랐다.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종로경찰서의 형사였다. 우선은 김현수의 가는 집을 잘 알았다. 그 집은 우물 북쪽에 있는 조고마한 암자라, 여러 암자 중에 제일 깨끗하고 조용한 암자였다. 우선은 형식에게 손짓을 하여 문 밖에 서 있으라 하고 가만히 안에 들어갔다. 형식은 ‘여기 영채가 있는가’ 하고 다리를 떨며 귀를 기울였다. 똑똑지는 아니하나 여자의 괴로워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형식은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한 걸음 더 들어서서 귀를 기울였다. 과연 여자의 괴로워하는 소리로다. 형식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뛰어들어갔다. 방에는 불이 켜 있고, 문을 닫쳤는데 머리를 깎은 사람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형식의 호흡은 차차 빨라진다. 우선이가 창으로 엿보다가 고양이 모양으로 가만가만히 나오면서 형식의 어깨에 손을 짚고 가늘게 일본말로,
“모 다메다(벌써 틀렸다)” 한다. 형식은 그만 눈에 불이 번뜻 하면서 ‘흑’ 하고 툇마루에 뛰어오르며 구두 신은 발로 영창을 들입다 찼다. 영창은 와지끈 하고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떨어져 들어간다. 형식은 영창을 떠들고 일어나는 사람을 얼굴도 보지 아니하고 발길로 차넘겼다. 어떤 사람이 형식의 팔을 잡는다. 형식은 입에 거품을 물고,
“이놈, 배명식아!” 하고는 기가 막혀 말이 아니 나온다. 형식은 아니 잡힌 팔로 배학감의 면상을 힘껏 때리고, 아까 형식의 발길에 채어 거꾸러진 사람을 힘껏 이삼 차나 발길로 찼다. 그 사람은 저편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형식은,
“이놈, 김현수야!”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넘어져 깨어진 영창을 들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흑흑 느낀다. 손과 발은 동여매였다. 그러고 치마와 바지는 찢겼다. 머리채는 풀려 등에 깔렸고, 아랫입술에서는 빨간 피가 흐른다. 방 한편 구석에는 맥주병과 얼음 그릇이 넘느른하고 어떤 것은 깨어졌다. 형식은 얼른 치마로 몸을 가리고 손발 동여맨 여자를 안아 일으켰다. 여자는 얽어매인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운 대로 울기만 한다. 우선도 방 안에 들어왔다. 얽어매인 손발을 풀면서 형식더러,
“두 사람은 포박되었네” 하고 웃는다. 형식은 이러한 경우에 웃는 우선을 원망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선은 이러한 사건을 형식의 모양으로 그리 큰 사건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우선은 천하 만사를 웃고 지내려는 사람이었다. 형식은 얼굴에 꼭 대고 있는 여자의 손목을 풀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손을 낯에서 떼지 아니하고 운다. 형식은 얼마큼 분한 마음이 스러지고 냉정하게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형식은 우뚝 서서 옷고름이 온통 풀어지고 옷이 흘러내려 하얀 허리가 한 뼘이나 내어놓인 것을 보고 새로운 슬픔이 생긴다. 형식은 ‘이것이 과연 박영채인가’ 하고 ‘박영채가 아니면 좋겠다’ 하였다. 그러고 그 옷을 보고 머리를 보았다. 무론 그 여자는 모시 치마도 입지 아니하고, 서양 머리도 쪽찌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그 치마를 만든 감이 다만 무슨 비단이어니 할 따름이요, 무엇인지를 몰랐다. 머리에 핏빛 같은 왜증 댕기를 들이고 손에는 누런 빛 있는 옥지환을 꼈다. 형식은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 얼굴을 보고자 아니하였나니, 대개 그 얼굴이 ‘박영채’일까 보아 두려워함이라.
우선은 그가 월향인 줄을 알았다. 그러나 월향이가 그 친구 되는 이형식의 은인의 따님이요, 또 이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다는 말을 듣고는 월향더러 ‘얘, 월향아’ 하고 부르기도 미안하고, 또 월향의 곁에 가까이 가기도 미안하였다. 그래서 한 걸음쯤 형식의 뒤에 서서 형식의 하는 양만 보고 섰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낯에 손을 대고 울 뿐이라 형식도 무어라고 부를 줄을 몰라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다가 그 여자더러,
“여보시오! 그 짐승놈들은 포박되었으니 안심하시오” 하였다. ‘안심하시오’ 하는 형식도 그 안심하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 짐승놈들이 포박되고 아니 되기에 무슨 안심하고 안심 아니함이 있으리요. 아까 우선이가 형식에게 한 말과 같이 ‘모 다메다’가 아니뇨. 우선은 참다못하여,
“여보시오. 박영채 씨!” 하였다. 우선은 그 여자가 월향인 줄을 알며 또 월향은 즉 박영채인 줄을 알았다. 그러므로 한 달 동안이나 ‘얘, 월향아!’ 하던 것을 고쳐 ‘여보시오, 박영채 씨’ 한 것이라. 갑자기 ‘씨’를 달고 ‘얘’를 변하여 ‘여보시오’ 하기가 보통 사람에게는 좀 어려운 일이언마는 우선에게는 그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라 우선은 다시,
“여보시오! 박영채 씨! 여기 이형식 형이 오셨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여자는 몸을 흠칫하며 두 손을 갑자기 떼더니 정신없는 듯한 눈으로 형식을 본다. 형식도 그 얼굴을 보았다. 그는 월향이었다! 박영채였다! 영채도 형식을 보았다. 그는 형식이었다! 이형식이었다! 형식과 영채는 한참이나 나무로 새긴 사람 모양으로 마주보았다. 우선은 말없이 마주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렇게 세 사람은 한참이나 마주보았다. 이윽고 우선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다음에 형식과 영채의 눈에도 눈물이 돌았다. 영채는 피 흐르는 입술을 한번 더 꼭 물었다. 옥으로 깎은 듯한 영채의 앞닛박이 빨갛게 물이 든다. 형식은 두 팔로 가슴을 안으며 고개를 돌린다. 우선은 형식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형식은 소리를 내어 운다. 영채는 다시 앞으로 쓰러지며 운다. 우선도 입술을 물고 옷소매로 눈물을 씻었다. 종소리가 서너 번 똥……똥 울어 온다.

무정 - 04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