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외숙모님과 같이 잤는데 그 어른은 노인이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돌아눕는 소리만 들리고 암만 기다리니 잠드는 양이 아니 보입니다. 그래 기다리다 못하여 뒷간에 가는 체하고 일어나 옷을 입었습니다. 외숙모님께서도 의심이 나시는지, 옷은 왜 입느냐 하십데다. 그래서 뒤보러 가노라 하고 얼른 문 밖에 나섰습니다. 여자의 옷으로는 혼자 도망할 수가 없을 줄을 알고 제 조카의 옷을 훔쳐 입으리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정말 도적질을 하게 되었지요” 하고 웃으며, “마침 저녁에 옷을 다려서 대청에 놓은 줄을 알므로 가만가만히 대청에 가서 제 옷을 벗어 놓고 조카의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때는 팔월 열사흘이라, 달이 짜듯하게 밝고 밤바람이 솔솔 부옵데다. 가만히 대문을 나서니 참 황황합데다. 평양이 동인지 서인지도 모르고 돈 한푼도 없이 어떻게 가는고 하고 부모 생각과 제 몸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납데다. 그러나 이 집에는 더 있지 못할 줄을 확실히 믿으므로 더벅더벅 앞길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대문간에서 자던 개가 저를 보고 우두커니 섰더니 꼬리를 치면서 따라나옵데다. 한참 나와서 길가 큰 들매나무 아래 와서 저는 펄썩 주저앉았습니다. 거기서 한참이나 울다가 곁에 섰는 개를 쓸어안고, ‘나는 멀리로 간다.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할까 보다. 일년 동안 네가 내 동무 노릇을 하였구나. 그러나 나는 너를 버리고 멀리로 간다. 집에 가서 누가 내 거처를 묻거든 아버지를 찾아 평양으로 가더라고 일러라’ 하고 다시 일어나서 갔습니다. 참 개도 인정을 아는 듯해요. 제 옷을 물고 매어달려서 킁킁하면서 도로 집으로 가자는 시늉을 합데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못 들어간다. 너나 들어가거라’ 하고 손으로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개는 떨어지지 아니하고 따라옵데다. 저도 외로운 밤길에 동무나 될까, 하고 구태 때려 쫓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저것 보게. 개가 도리어 사람보다 낫지” 하고 노파가 눈물을 씻는다. 영채는 도리어 웃으면서,
“그러니 어디로 갈지 길을 알아야 아니합니까. 지난봄에 나물하러 갔다가 넓은 길을 보고 이 길이 서편으로 가면 의주와 대국으로 가고, 동편으로 가면 평양도 가고 서울도 간다는 말을 들었기로 허방지방 그리로만 향하였습니다. 촌중 앞으로 지날 적마다 개가 짖는데 개 소리를 들으면 한껏 반갑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데다. 저를 따라오는 개는 짖지도 아니하고 가만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저를 따라옵데다.
그렇게 얼마를 가노라니 촌중에서 닭들이 우는데 저편에 허연 길이 보입데다. 옳다구나 하고 장달음으로 큰길에 나섰습니다. 나서서 한참이나 사방을 돌아보다가 대체 달 지는 편이 서편이려니, 하고 달을 등지고 한정없이 갔습니다.
이튿날 조반도 굶고 낮이 기울어지도록 가다가 시장증도 나고 다리도 아프기로 길가 어느 촌중에 들어갔습니다. 집집에 떡치는 소리가 나고 아이들은 새옷을 갈아입고 떼를 지어 밀려다닙데다. 저는 그중에 제일 큰 집 사랑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랑에는 여러 어른들이 모여서 술을 먹고 웃고 이야기합데다. 길 가던 아인데 시장하여 들어왔노라 하니까 주발에 떡을 한 그릇 담아 내어다 줍데다. 시장했던 김이라 서너 개나 단숨에 먹노라니까 사랑에 앉은 어른 중에 수염 많이 나고 얼굴 투돔투돔한 사람이 제 곁에 와서 머리를 쓸며 ‘뉘 집 아인고. 얌전도 하다’ 하면서 성명을 묻고, 사는 데를 묻고, 부친의 이름을 묻고, 나를 묻습데다. 저는 숙천 사는 김 아무라고 되는 대로 대답하고 안주 외가에 갔다 오노라고 하였더니, 제 얼굴빛과 대답하는 모양이 수상하던지, 여러 어른들이 다 말을 그치고 저만 쳐다봅데다. 저는 속이 덜렁덜렁하고 낯이 훅훅 달아서 떡도 다 먹지 못하고 일어나 절한 뒤에 문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나온즉, 장난꾼 아이들이 모여섰다가 저를 보고 ‘얘 너 어디 있는 아이냐? 어디로 가느냐’ 하고 성가스럽게 묻습니다. ‘나는 숙천 있는 아이로다. 안주 외가에 갔다 온다’ 하고 고개를 숙이고 달아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이 말을 묻는데 뛰기는 왜 뛰어’ 하고 트집을 잡고 따라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이 어리고 밤새도록 걸음을 걸어 다리가 아파서 뛰지 못할 줄을 알고 우뚝 섰습니다. 그제는 아이놈들이 죽 둘러서고 그 중에 제일 큰 놈이 와서 제 목에다 손을 걸고 구린내를 피우면서 별의별 말을 다 묻습니다. 대답하면 묻고, 대답하면 또 묻고, 다른 아이놈들은 웃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고 쿡쿡 찌르기도 하고 아무리 빌어도 놓아 주지를 아니합니다. 한참이나 부대끼다가 하릴없이 으아 하고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마침 그때에 저리로서 큰기침 소리가 나더니 서당 훈장 같은 이가 정자갓을 젖혀 쓰고 기다란 담뱃대를 춤을 추이면서 오다가, ‘이놈들, 왜 그러느냐’ 하고 호령을 하니까 아이놈들이 사방으로 달아납데다. 저는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달음질을 하여 나왔습니다. 뒤에서는 아이놈들이 욕하고 떠드는 소리가 들립데다. 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였습니다. 큰길에 나서니 개가 어디 있다가 따라나옵데다. 어떤 아이놈이 돌로 때렸는지 귀밑에서 피가 조곰 납데다. 저는 울면서 호― 하고 불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쉬엄쉬엄 또 동으로만 향하고 갔습니다.
몸은 더할 수 없이 곤하고 해도 저물었습니다. 아까 혼난 생각을 하면 진저리가 나서 다시 어느 촌중에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밥 굶어서 한데에서 잘 수도 없으며 어쩌면 좋은가 하고 주저하다가 어떤 길가 객점에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고생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치가 떨립니다” 하고 손을 한번 비틀고 한숨을 내어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