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무정 - 093장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무정 - 093장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무정 - 093장

영채는 차차 이 집 내용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가정이란 맛을 보지 못한 영채에게는 부모 있고, 형제 있고, 자매 있는 이 가정은 마치 선경같이 즐겁고 행복되어 보이더니 점점 알아본즉 그 속에도 슬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 첫째는 부자간에 뜻이 맞지 아니함이니, 아들은 동경에 가서 경제학을 배워 왔으므로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본을 내어 무슨 회사 같은 것을 조직하려 하나, 부친은 위태한 일이라 하여 극력 반대한다. 또 딸을 동경에 유학시키는 데 대하여서도 아들은 찬성하되 부친은 ‘계집애가 그렇게 공부는 해서 무엇 하느냐, 어서 시집이나 가는 것이 좋다’ 하여 반대한다. 방학에 집에 올 때마다 부친은 반드시 한두 번 반대하지마는 마침내 아들에게 진다. 작년 여름에는 반대가 우심하여 동경 갈 노비를 아니 준다 하므로 딸은 이틀이나 울고, 아들과 어머니는 부친 모르게 돈을 변통하여 노비를 당하였다. 그래서 딸은 부친께는 간다는 하직도 못 하고 동경으로 떠났다. 그 후에 며칠 동안 부친은 성을 내어 식구들과 말도 잘 하지 아니하였으나 얼마 아니 하여, “얘, 이달 학비는 보냈니? 옷값이나 주어라”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부친은 기어이 딸을 시집보내려 한다 하고, 아들은 졸업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여 두어 번이나 부자끼리 다투었다. 부친은 자기의 친구의 아들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지금 어느 재판소 서기로 있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 그가 작년에 상처한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기어이 사위를 삼으려 하나 아들은 반대한다. 그 사람은 원래 부유한 집 자제로 십육칠 세부터 좀 방탕하게 놀다가 벼슬이 하고 싶다는 동기로 전수학교에 입학하였다. 근래에 흔히 있는 청년과 같이 별로 높은 이상이라든지 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금줄을 두르고 칼 차는 것을 유익한(유일한) 자랑으로 알며, 한 달에 몇 번씩 기생을 희롱하여 월급 외에도 매삭 몇십 원씩 집에서 돈을 가져간다. 좀 교만하고 경박하고 허영심 있는 청년이라. 그러나 부친은 무엇에 혹하였는지 모르되, 이 사람밖에는 좋은 사람이 없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아들은 이 사람을 싫어할 뿐더러 도리어 천하게 여긴다. 이리하여 부자간에는 만사에 별로 의견이 일치하는 일이 없다. 부친은 아들을 고집쟁이요 철이 없고 부모의 말을 아니 듣는다 하고, 아들은 부친을 완고하고 무식하고 세상이 어떻게 변천하는지를 모른다 한다. 그러면서도 부친은 아들의 진실함과 친구간에 존경받는 줄을 알고, 아들은 그 부친의 진실함과 부드러운 애정이 있는 줄을 안다. 이러므로 부자간에는 무엇이나 반대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로 일치하는 점이 있어 모친은 특별한 의견은 없으되 흔히 아들에게 찬성한다. 그러할 때마다 부친은 모친을 한번 흘겨보고, 모친도 부친을 한번 흘겨본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애들이 서로 흘겨보는 것과 같아서 얼른 풀어지고 만다.
그 다음에 걱정은 아들 내외의 사이에 정이 없음이다. 영채가 이 집에 온 지가 십여 일이 되도록 그 내외간에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지나가는 사람 모양으로 서로 슬쩍 보고는 고개를 돌리든지 나가든지 한다. 그래도 아내는 밤낮 남편의 옷을 빨고 다리고 한다. 영채가 여기 온 후로는 밤마다 며느리와 딸과 자기와 한방에서 잤다. 그러고 아들은 사랑에서 혼자 자는 모양이었다. 영채는 얼마큼 미안한 생각이 있어서 병욱더러 다른 방에 가기를 청하였더니 병욱은 웃으며,
“걱정 마시오. 우리 오빠는 아니 들어오셔요.”
“왜 그러시나요?”
“모르지요. 이전에는 아니 그러더니 일본 갔다 와서부터 차차 멀어갑데다” 하고 입을 영채의 귀에 대며, “그래서 우리 형님이 나를 보고 울어요” 하고 동정하는 듯이 한숨을 쉰다. 영채도 며느리가 불쌍하다 하였다. 그렇게 얼굴도 얌전하고 마음도 고운 부인을 왜 싫어하는고 하여,
“무엇이 불만해서 그러나요?”
“모르지요. 불만할 것이 없을 듯하건마는 애정이 아니 하는(가는) 게지요. 내가 오빠한테 물어 보니까,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런지 모르지마는 그저 보기가 싫구나 합디다. 아마 형님이 오빠보다 나이 많아서 그런지? 참 걱정이야요” 하고 고개를 흔든다. 영채는 놀라며,
“형님께서 나이 많으셔요?” 영채도 그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달리 적당한 칭호도 없었거니와 또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오 년 장이랍니다” 하고 웃으며, “형님이 처음 시집올 때에는 우리 오빠는 겨우 열두 살이더라지요…… 형님은 열일곱 살이구, 그러니 무슨 정이 있겠어요. 말하자면 형님이 오빠를 길러 냈지요. 한 것이 다 자라나서는 도리어……” 하고 호호 웃는다. “오빠도 퍽 다정하고 마음씨 고운 사람이언마는, 애정이란 마음대로 안 되나 봐요” 하고 두 처녀는 두 내외에게 무한한 동정을 준다. 영채는,
“그러면 어쩌면 좋아요. 늘 그래서야 어떻게 사나요.”
“요새 젊은 부부는 대개 다 그렇대요. 큰 문제지요. 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터인데……” 하고 두 처녀가 마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