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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010장

“돈 한푼도 없이?” 하고 노파가 걱정을 한다.
“돈이 있으면 그처럼 고생은 아니하였겠지요” 하고 말을 이어,
“객점에 드니깐 먼저 든 객이 육칠 인 되옵데다. 주인이 아랫목에 앉았다가 저를 보고 ‘너 어떤 아이냐’ 하기로 길 가던 아인데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고 가려노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저녁을 먹어야 하겠구나 하기에, 돈이 한푼도 없어서 밥을 사먹을 수 없으니 자고나 가게 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즉, 주인이 ‘그러걸랑은 저 안동네 뉘 집 사랑에 들어가 자거라. 우리집에는 손님이 많아서 잘 데가 없다’ 고 합데다. 그제 손님 중의 한 분, 머리도 깎고 매우 점잖아 보이는 이가 주인더러, ‘어린것이 이제 어디로 가겠소. 내가 밥값을 낼 것이니 저녁과 내일 아침 조반을 먹이고 재우시오’ 합데다. 저는 그때에 어떻게나 고마운지 마음 같아서는 아저씨, 하고 엎데어 절이라도 하고 싶습데다. 그래 저녁을 먹고 나서 여러 손님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가 어느 틈에 윗목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자다가 어떤 도적놈에게 잡혀가는 무서운 꿈을 꾸고 잠을 깨어 가만히 들은즉, 방 안에 객들이 무슨 토론을 하는 모양입데다. 하나가 ‘아니어, 사나희지’ 하면, ‘그럴 수가 있나? 그 얼굴과 목소리가 단정코 계집아이지요’ 하고, 그러면 또 하나가 ‘어린 계집아이가 남복을 하고 혼자 갈 이유가 있나?’ 하면서 저를 두고 말함이 분명합데다. 아뿔싸, 이 일을 어쩌나 하고 치를 떨고 누웠는데, 여러 사람들은 한참이나 서로 다투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이 ‘다툴 것이 있는가 보면 그만이지’ 하고 저 있는 데로 옵데다. 저는 기가 막혀 벽에 꼭 붙었습니다. 그러나 힘센 어른을 대적할 수가 있습니까. 마침내 제 본색이 탄로되었습니다. 부끄럽기도 그지없고 설기도 그지없고 분하기도 그지없어 하염없이 소리를 놓아 울었습니다.”
“저런 변이 있나. 그 몹쓸놈들이 밤새도록 잠은 아니 자고 그런 토론만 하였구먼” 하고 노파가 분하여 한다.
“그래 한참 우는데 제 몸을 보던 사람이 말하기를, ‘자― 여러분, 이제는 내기한 대로 내가 이 계집아이를 가지겠소’ 하면서 제 등을 툭툭 두드립데다. 그래 저는 평양 계신 아버님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간절히 말하고 빌었습니다. 한즉, 그 사람 대답이, ‘아버님은 오는 달에 찾아가고 우선 내 집으로 가자’ 하면서 팔을 제 목 아래로 넣어 저를 일으켜 앉히며, 어서 가자 합데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행여나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있는가 하고.”
“아까 밥값 내어 준다던 사람은 어디로 갔던가요” 하고 형식이가 주먹을 부르쥐고 물었다.
“글쎄 말씀을 들으십시오. 지금 저를 데려가려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외다그려. 여러 사람들은 그 사람을 무서워하는지 아무 말도 없이 빙글빙글 웃기만 합데다. 저는 울면서 빌다 빌다 못하여 마침내 사람 살리시오 하고 힘껏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제 울음 소리에 개들이 야단을 쳐 짖는데 그 중에 제가 데리고 온 개 소리도 납데다. 그제는 그 사람이 수건으로 제 입을 꼭 동여매더니 억지로 뒤쳐업고 나갑데다. 방에 있던 사람들은 내다보지도 아니하고 문을 닫칩데다” 하고 잠시 말을 그친다.


형식은 영채의 기구한 운명을 듣고 자기의 어렸을 때에 고생하던 것에 대조하여 한참 망연하였었다. 영채는 그 악한에게 붙들려 장차 어찌 되려는가. 그 악한은 영채의 어여쁜 태도를 탐하여 못된 욕심을 채우려 하는가. 또는 영채의 몸을 팔아 술과 노름의 밑천을 만들려 함인가. 아무려나, 영채의 몸이 그 악한에게 더럽혀지지나 아니하였으면 하였다. 그리하고 영채의 얼굴과 몸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대개 여자가 남자를 보면 얼굴과 체격에 변동이 생기는 줄을 앎이다. 어찌 보면 아직 처녀인 듯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이미 남자에게 몸을 허한 듯도 하다. 더구나 그 곱게 다스린 눈썹과 이마와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가 아무리 하여도 아직도 순결한 처녀같이 보이지 아니한다. 형식은 영채에게 대하여 갑자기 싫은 마음이 생긴다. 저 계집이 이때까지 누군지 알 수 없는 수없는 남자에게 몸을 허하지나 아니하였는가. 지금 자기 신세 타령을 하는 저 입으로 별의별 더러운 남의 입술을 빨고, 별의별 더러운 남의 마음을 호리는 말을 하던 입이 아닌가. 지금 여기 와서 이러한 소리를 하고 가장 얌전한 체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육칠 년 전의 애정을 이용하여 나를 휘어넘기려는 휼계(譎計)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선형을 생각하였다. 선형은 참 아름다운 처녀라.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마음조차 아름다운 처녀라. 저 선형과 이 영채를 비교하면 실로 선녀와 매음녀의 차이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또 한번 영채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고이고 얼굴에는 거룩하다고 할 만한 슬픈 빛이 보인다. 더욱이 아무 상관없는 노파가 영채의 손을 잡고 주름잡힌 두 뺨에 거짓없는 눈물을 흘림을 볼 때에 형식의 마음은 또 변하였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죄로다. 영채는 나를 잊지 아니하고 이처럼 찾아와서 제 부모나 형제를 만난 모양으로 반갑게 제 신세를 말하거늘, 내가 이러한 괘씸한 생각을 함은 영채에게 대하여 큰 죄를 범함이로다. 박선생같이 고결한 어른의 따님이, 그렇게 꽃송아리같이 어여쁘던 영채가 설마 그렇게 몸을 더럽혔을 리가 있으랴. 정녕시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면서도 송죽의 절개를 지켜 왔으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 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어 왔는고. 영채는 다시 말을 이어, 그 악한에게 잡혀가는 일에서부터 지금까지 지내 오던 바를 말한다.

무정 - 01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