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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 035장

영채가 형식을 대하여 자기의 신세를 말하다가 문득 생각한즉 자기는 기생의 몸이라 형식이 아직 혼인 아니하였다는 말을 들으며 잠깐 기뻐하였으나, 자기가 기생인 줄을 알면 형식은 반드시 자기를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또 설혹 돌아볼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내 몸은 돈이 있고야 구원할 몸이어늘, 가만히 형식의 살림살이를 보매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자기가 기생인 줄을 알려 일생에 그리워하던 형식에서 마음으로까지 버림이 되기보다, 또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더라도 구원할 힘이 없어 사랑하는 형식으로 하여금 부질없이 마음을 괴롭게 하기보다, 이러하기보다 차라리 대동강수에 풍덩실 몸을 던져 오 년 전에 먼저 간 월화의 뒤를 따라 저세상에서 월화로 더불어 같이 노닐려 하였다. 월화의 얼굴이 영채의 앞에 보이며 ‘영채야 나와 같이 가자’ 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손에 있는 옥지환을 보다가 중도에 말을 끊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라.
영채는 곧 평양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였다. 몸을 던져 세상을 버릴진대 사랑하던 ‘월화 형님’의 몸을 던지던 대동강을 찾아가려 하였다. 평양에 가 우선 북망산에 아버지와 월화의 무덤을 찾아 그 동안 지내 오던 정회나 실컷 말하리라 하였다. 부친은 내가 기생 되었다는 말을 듣고 죽었으니 무덤에나마 가서 내가 기생으로 몸을 판 것은 부친과 두 형제를 구원하려 함임과, 기생이 된 지 육칠 년에 부친의 혈육을 받은 이 몸을 다행히 더럽히지 아니하였음과, 부친께서 이 몸을 허하신 이형식을 위하여 지금껏 아내의 절행을 지켜 온 것을 말하고, 죽은 후에 만일 영혼이 있거든 생전에 섬기지 못하던 한을 사후에나 풀리라 하였다. 만일 부친이 극락에 가셨거든 극락으로 찾아가고, 만일 지옥에 가셨거든 지옥으로 찾아가리라 하였다.
월화의 부탁을 나는 지켰다. 나는 세상에 섞이지 아니하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을 위하여 육칠 년간 고절(苦節)을 지켰다. 나는 월화가 하다가 남겨 둔 생활을 하였다. 나는 이제 네게로 돌아간다 하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니 영채의 몸은 바로 그때에 그 학생들이 ‘천하 사람 꿈꾸는데 나만 깨어서,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 부르도다’ 하는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이 청류벽 위에 선 듯하다. 영채는 박명한 십구 년의 일생을 생각하였다. 더구나 형식을 대하였을 때에 말하던 과거의 기억이 바로 어저께 지난 일 모양으로 역력히 눈앞에 보이고, 그 모든 광경이 제가끔 영채의 가슴을 찌르고 창자를 박박 긁는 듯하다. 사람으로 세상에 생겨나서 즐거운 재미란 하나도 보지 못하고 꽃다운 청춘이 속절없이 대동강 무심한 물결 속에 스러질 것을 생각하니 원망스럽기도 하고 가이없고 원통하기도 하다. 십구 년 일생의 절반을 무정한 세상과 사람에게 부대끼고 희롱감이 되다가 매양에 그리고 바라던 이형식을 만나기는 만났으나 정작 만나고 보니 이형식은 나를 건져 줄 것 같지도 아니하고…… 아아, 이것이 무슨 팔자인고 하고 그날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캄캄한 방에서 혼자 울었다. 이 팔은 어찌하여 생각하던 사람을 안아 보지 못하고, 이 젖은 어찌하여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을 빨려 보지 못하는고, 가슴속에 가득 찬 정과 사랑을 생각하던 이에게 주어 보지 못하고 마는고. 내 몸은 일생에 ‘기생’이란 이름만 듣고, 어찌하여 ‘아내’라든가 ‘부인’이라든가 ‘어머니’라든가 ‘아주머니’라든가 하는 정답고 거룩한 이름을 못 듣고 마는고. ‘기생!’ ‘기생!’ 에그 듣기 싫은 이름이도다. ‘기생!’이라는 말만 하여도 치가 떨린다 하였다. 지금 황금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사려는 사람이 사오 인이 된다고 한다. 지나간 칠 년 동안에 노래와 춤으로 수만 원 돈을 벌어 주어, 논밭도 사고 큰 집도 사고 비단 옷도 입게 되었으니 그만하면 자유로 놓아 주어도 마땅하건마는 아직도 욕심을 다 채우지 못하여 천 원이니 이천 원이니 하고 이 몸을 팔아먹으려 한다. 파는 놈도 파는 놈이어니와 사는 놈도 사는 놈이라. 지금까지는 이럭저럭 정절을 지켜 왔건마는 이제 몸이 뉘 첩으로 팔린 뒤에야 정절이 다 무슨 정절이뇨. 다만 죽을 뿐이다, 다만 죽을 뿐이다 하였다.
바라던 형식을 만나 본 것은 기쁘건마는 바라던 그 형식조차 나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이 절통하다 하였다.
영채는 그만 절망하였다. 지금까지 자기는 잠시 타향에 길을 잃었다가 선한 세계, 선한 사람 사는 고향으로 돌아가 칠 년 전 자기의 가정에서 누리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하였더니 모두 다 허사로다 하였다. 지금껏 유일한 선인으로 알아 오고 유일한 의지할 사람으로 알아 오던 형식도 정작 얼굴을 대하니 그저 그러한 사람인 듯, 칠 년간 악인들 사이에서 부대껴 오던 영채의 생각에는 형식같이 선한 사람은 얼굴이며 풍채며 말하는 것이 온통 항용 사람과 다르리라 하였다. 그러나 만나고 본즉 그저 그러한 사람이로고나. 옳다 죽는 수밖에 없다. 대동강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구태 더러운 세상에 섞여 구차히 목숨을 늘여 가기는 차마 못 하리니 하루바삐 새맑은 대동강 물결 밑에서 정다운 월화를 만나 서로 안고 이야기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에게는 돈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몇 친구에게 돈 오 원을 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얻지 못하고 점심때가 지나도록 방에 앉아 울었다. 형식이가 김장로의 집에서 선형과 순애를 대하여 즐거운 상상에 취하였을 때는 정히 영채가 자기 방에서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던 때였다. 이날 저녁에 영채를 찾아온 형식은 영채를 만났는가.

무정 - 03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