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병욱이가 혼자 앉아서 한 손으로 곁에 뉘어 놓은 바이올린을 되는 대로 울리며 영채에게 배운 {고문진보}를 읽을 적에 어디 갔다 오는 병국은 한 손에 파나마를 들고 부채를 부치며 들어와서 병욱의 방 문지방에 걸어앉으며,
“요새에는 또 한시(漢詩)에 미쳤구나. 이제는 음악은 내버리고 한시 공부나 하지” 하며 웃는다.
“왜요? 이렇게 손으로는 음악하고 눈으로는 시를 읽지요” 하고 자주 바이올린 줄을 울리며 아이들 모양으로 몸을 흔들고 소리를 내어서 시를 읽는다.
병국은 병욱의 몸 흔드는 양을 보고 웃고 앉았더니,
“손님은 어디 가셨니?” 한다.
(병국은 영채를 손님이라고 부른다.) 병욱은 고개를 번쩍 들고 웃으면서,
“손님 어디 오셨어요. 어디서 왔나요?”
병국은 누이가 자기를 조롱하는 줄을 알면서도 정직하게,
“아, 그이 말이다.”
“아, 그이가 누구 말이야요?” 병욱은 병국이가 영채를 위하여 괴로워하는 줄을 알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병국은,
“그만두어라” 하고 휙 돌아앉는다. 병국은 견디지 못하여 일어서서 나가랸다. 병욱은 뛰어나와 병국의 소매를 당기며,
“오빠, 들어오십시오. 내가 잘못했으니.”
“싫다, 어디 가야겠다” 하고 팔을 잡아챈다. 병욱은 깔깔 웃으며,
“글쎄 여쭐 말씀이 있으니 여기 좀 앉으셔요” 하는 말에 병국은 또 앉았다. 병욱의(병욱은) 손으로 병국의 등에 붙은 파리를 잡으며,
“오빠, 무슨 근심이 있어요?” 하고 웃기를 그치고 병국의 얼굴을 모로 본다. 병국은 놀라는 듯이 고개를 돌려 병욱을 보며,
“아니, 왜? 무슨 근심 빛이 보이니?”
“녜, 어째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애요” 하고 ‘나는 그 근심을 알지’ 하는 듯이 생긋 웃는다. 병국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웃으면서,
“양잠회사를 꼭 세워야 하겠는데 아버지께서 허락을 아니 하시는구나. 그래서 지금도 그 일로 갔다가 오는 길이다. 너는 바이올린이나 뽕뽕 울리고, 나는 돈을 벌어야지…….”
병욱은 한 걸음 물러서서 다른 데를 보며 비웃는 듯이,
“흥, 그것이 근심입니다그려. 내가 돈을 너무 써서. 그렇거든 그만둡시오. 나는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공부하지요. 여자는 저 먹을 것도 못 번답디까.” 병국은 껄껄 웃으며,
“잘못했소, 누님. 그렇게 성내실 게야 있소? 제가 남을 조롱하니까, 나도 당신을 조롱하지요.”
병욱은 다시 병국의 곁에 와 서며,
“그것은 농담이구요” 하고 앉아서 몸을 우쭐우쭐하며 소리를 낮추어, “오빠, 나 영채 데리고 동경 가요. 좋지요?”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하고 극히 냉정한 체하나 벌써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말을 왜 하니?”
“일간 가게 해주셔요. 집에 있기도 싫고 또 영채를 데리고 가면 입학 준비도 해야지요. 그러니까 곧 떠나게 해주셔요” 하고 유심하게 병국을 본다. 병국은 누이의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그러고 누이의 정을 더욱 고맙게 여겼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만으론 확실치 못하므로,
“글쎄, 개학이 아직도 한 달이 있는데, 왜 그렇게 빨리 간다고 그러느냐.”
병욱은 형(오라비)의 눈을 이윽히 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어서 가야 해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하는 말에 병국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과연 그렇다. 영채가 오래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기는 괴로울 것이요, 또 미상불 위험도 없지 아니할 것이라. 자기도 그러한 생각이 있기는 있었다. 자기가 어디로 여행을 가든지 영채를 어디로 보내든지 하는 것이 좋을 줄을 알기는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끄는 힘이 있어서 실행을 못 하였다. 병국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옳다, 네 말이 옳다. 어서 가야 한다” 하고는 휘 한숨을 쉰다. 병욱은 형(병국)의 어깨를 만지며,
“영채도 오빠를 사랑하니 동생으로 알고 늘 사랑해 주십시오. 저도 제 동생으로 알고 늘 같이 지내겠습니다. 동경 가면 둘이 한집에 있어서 밥 지어 먹고 공부하지요. 불쌍한 사람을 건져 주는 것이 안 좋습니까. 또 영채 씨는 좀더 공부를 하면 훌륭한 일꾼이 되겠는데요.”
병국은 고개를 숙인 대로 누이의 말을 듣더니 손으로 무릎을 치고 몸을 쭉 펴면서,
“잘 생각하였다. 네게야 무엇을 숨기겠니. 실로 그 동안 퍽 괴로웠다” 하고 또 잠깐 생각하다가 한번 더 결심한 듯이, “그러면 언제 떠나겠니?”
“글쎄요, 오빠께서 가라시는 날 가지요.”
“그러면 모레 낮차에 가거라. 내일 노자를 얻어 줄 것이니.”
이때에 영채가 대문 밖으로서 뛰어들어오다가 병국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병국도 얼른 일어나서 답례한다. 영채는 뒷산에서 뜯어온 붓꽃〔花菖蒲〕 한줌을 병욱에게 준다. 병욱은 그 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더니 절반을 갈라 들며,
“이것은 오빠 책상 위에 꽂아 드려요. 이것은 우리 둘이 가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