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012장

형식은 영채의 말을 듣고 얼마큼 안심이 되었다. 영채의 얼굴을 다시금 보매, 새삼스럽게 정다운 마음과 사랑스러운 생각이 난다. 지금까지 영채의 절행을 의심하던 것이 죄송스럽다 하였다. 영채는 어디까지든지 옥과 같이 깨끗하고 눈과 같이 깨끗하다 하였다. 이전 안주에 있을 때에 보던 어리고 아리따운 영채의 모양이 뚜렷이 형식의 앞에 보이더니 그 아리따운 모양이 방금 그 앞에 앉아 신세 타령을 하는 영채와 하나가 되고 만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옳다, 은혜 많은 내 선생님의 뜻을 이어 영채와 부부가 되어 일생을 즐겁게 지내리라 하였다. 그러고는 자기와 영채가 부부 된 뒤에 할 일이 눈앞에 보인다. 우선 영채와 자기가 좋은 옷을 입고 목사 앞에 서서 맹세를 하렷다. 나는 영채의 손을 꼭 쥐고 곁눈으로 영채의 불그레하여진 뺨을 보리라. 그때에 영채는 하도 기쁘고 부끄러워 더욱 고개를 숙이렷다. 그날 저녁에 한자리에 누워 서로 꼭 쓸어안고, 지나간 칠팔 년간의 고생하던 것과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하던 말을 하리라. 그때에 영채가 기쁜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속에 쌓이고 쌓였던 정회를 풀 때에, 나는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전신을 바르르 떨며 영채를 껴안으리라. 그러면 영채도 내 가슴에 이마를 대고 ‘에그, 이것이 꿈인가요’ 하고 몸을 떨리리라. 그러한 후에 나는 일변 교사로, 일변 저술로 돈을 벌어 깨끗한 집을 짓고,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리라. 내가 저녁때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영채는 나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뛰어나오며 내게 안기리라. 그때에 우리는 서양 풍속으로 서로 쓸어안고 입을 맞추리라. 그러다가 이윽고 아들이 나렷다. 영채와 같이 눈이 큼직하고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나와 같이 체격이 튼튼한 아들이 나렷다. 그 다음에 딸이 나렷다. 그 다음에는 또 아들이 나렷다. 아아, 즐거운 가정이 되렷다.
그러나 영채가 만일 지금껏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으면 어쩌나. 내 마음과 내 사상을 알아주리만한 공부가 없으면 어쩌나. 어려서 글을 좀 읽었건마는 그 동안 칠팔 년간이나 공부를 아니 하였으면 모두 다 잊어버렸으렷다. 아아, 만일 영채가 이렇게 무식하면 어쩌는가. 그렇게 무식한 영채와 행복된 가정을 이룰 수가 있을까. 아아, 영채가 무식하면 어쩌나. 이렇게 생각하매 지금까지 생각하던 것이 다 쓸데없는 듯하여 어째 서어한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형식은 영채의 얼굴을 다시금 보았다. 그 몸가짐과 얼굴이(얼굴의) 표정이 아무리 하여도 교육 없는 여자는 아니로다. 더구나 그 손과 옷을 보매, 지금껏 괴로운 일로 고생은 아니한 듯하다. 아무리 보아도 영채는 고등한 가정에서, 고등한 교육을 받은 사람인 듯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저렇게 몸가짐에 자리가 잡히고, 말하는 것이 저렇게 얌전하고 익숙지 못하리라 하였다. 더구나 그 말에 문학적 색채가 있는 것을 보니 아무리 하여도 고등한 교육을 받았구나 하였다.
혹 내가 남의 도움을 받아 이만큼이라도 출세를 하게 된 모양으로 그도 누구의 도움을 받아 편안히 지내면서 어느 학교를 졸업하지 아니하였는가. 마치 김장로의 집에 있는 윤순애 모양으로 어느 귀족의 집이나, 문명한 신사의 집에서 여태까지 공부를 하지나 아니하였는가. 혹 금년쯤 어느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지나 아니하였는가. 그렇기만 하면 오죽 좋으랴. 옳다, 그렇다 하고 형식은 혼자 믿고 좋아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어서 영채의 그 후에 지낸 내력을 듣고 싶었다. 영채의 하는 말은 꼭 자기의 생각한 바와 같으려니 하였다.


영채는 노파가 정성으로 베어 주는 배를 한쪽 받아 먹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말한 것도 고생이 아님이 아니요, 눈물 흘릴 일이 아님이 아니나, 이제부터 말할 것은 그보다 더한 슬픈 일이라. 혼자 이따금 그 일을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가 나는데 다른 사람을 대하여 그러한 일을 말하게 되니 더욱 비감도 하고, 또 일변 부끄럽기도 하다. 영채는 이래 사오 년간에 사람도 퍽 많이 대하였고, 잠시나마 형제와 같이 친히 지내던 친구도 꽤 많았었다. 혹 같은 친구들이 모여앉아서 신세 타령을 할 때에 여러 가지 못할 말 없이 다 하면서도 지금 형식에게 말하려는 말은 아직 하여 본 적이 없다. 대개 이런 말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다만 그것 불쌍하다고나 할 따름이요, 깊이 자기를 동정하여 주지 아니할 줄을 앎이라. 영채는 극히 절친한 친구에게라도 자기의 신분은 말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웃 사람의 손에 일어났노라 할 뿐이었었다. 대개 그는 차마 그 아버지의 말을 할 수 없고 그의 진정한 신세를 말할 수 없음이라. 이리하여 그는 슬픈 경력을 제 가슴속에 깊이깊이 간직하여 두었었다. 아마 그가 일생에 형식을 만나지 아니하였슨들 그의 흉중에 쌓이고 (쌓인 회포와 맺히고 맺힌 원한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지 아니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세상에 사람이 많건마는 제 가슴속에 깊이깊이 간직한 회포를 들어 줄 사람이 몇이나 되리요. 영채는 그 동안 지극히 마음이 괴로울 때에는, 혹 그 중에 자기를 가장 동정하는 사람을 구하여 한번 시원히 자기의 신세 타령이나 하여 보리라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 실컷 신세 타령을 하고 나면 얼마큼 몸이 가뜬하여지려니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이 다 자기를 희롱하고 잡아먹으려는 사람뿐이었다. 길가에 본체만체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무론이어니와 가장 다정한 듯이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말소리로 가까이 오는 자도 기실은 나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그러함이 아니라 나를 속이고 나를 농락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 함이었다.

무정 - 01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