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016장

영채가 하던 말을 그치고 갑자기 일어나 나가는 양을 보고 형식은 한참 망연히 섰다가 모자도 아니 쓰고 문 밖에 뛰어나갔다. 그러나 하고많은 행인 중에 영채의 거처를 알 수가 없었다. 형식은 영채가 나올 때에 곧 뒤따라 나오지 아니한 것을 한하였다. 형식은 잠시 동안 행길로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낙심하여 집에 돌아왔다. 노파는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앉았더라.
형식은 혼자 책상에 의지하여 영채의 일을 생각하였다. 영채가 어찌하여 중간에 하던 이야기를 끊고 총총히 돌아갔는가. 왜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그렇게 슬피 울었는가. 아무리 하여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혹 내가 영채에게 대하여 불만한 거동을 보였는가. 아니라, 나는 영채의 말을 들을 때에 지극한 동정과 정성으로써 하였다. 아까 영채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볼 때에 나는 그 눈물 고인 맑은 눈을 보고 더할 수 없이 사랑하는 정이 생겼다. 영채는 내 얼굴에서 그 빛을 보았으려니, 그러면 어찌하여 하던 말을 중도에 끊고 그렇게 총총히 일어 갔는고. 암만하여도 내게 차마 말하지 못할 무슨 깊은 사정이 있나 보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사정일까. 나를 찾아올 때에는 아무러한 사정이라도 다 말하려고 왔겠거늘, 어찌하여 하던 말을 그치고 총총히 돌아갔는고. 옳다, 아까 주인 노파가, ‘여학생 모양을 하였으나 암만해도 기생 같습데다’ 하더니 참말 그러한가 보다. 홀몸으로 평양에 왔다가 어떤 못된 놈이나 년의 꼬임에 들어 그만 기생이 되었는가 보다. 서울서 기생 노릇을 하다가 어찌어찌 풍편에 내가 여기 있단 말을 듣고 찾아왔던가 보다. 만일 그렇다 하면 그가 무슨 뜻으로 나를 찾았을까. 어려서 같이 놀던 동무를 그리워서 한번 만나 보기나 하리라 하고 나를 찾았을까. 그리하여 나를 만나매, 옛날 생각이 나고 부모와 형제 생각이 나서 나를 보고 울다가 마침내 신세 타령을 시작한 것일까. 그러다가 제가 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하면 내가 제게 대하여 불쾌한 생각을 품을까 저어하여 하던 말을 뚝 끊고 돌아갔음일까. 그러고 보면 그는 실로 기생의 몸이 되었는가. 그 은혜 많은 박선생의 따님이 그만 기생의 몸이 되었는가. 세상을 위하여 몸과 맘을 다 바치던 열성 있는 박선생의 따님이 그만 세상의 유혹을 받아 부랑한 남자들의 노리갯감이 되었는가. 혹 어떤 유야랑(遊冶郞)과 오늘 저녁에 만나기를 약속하고 그 약속한 시간이 오기 전에 잠깐 나를 찾은 것이 아닌가. 또는 그 유야랑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잠깐 내 집에 들렀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듯도 하다. 아까 영채의 뒤를 따라 행길에 나갔을 때에 교동파출소 앞으로 어떤 키 큰 남자와 여자 하나가 어깨를 겯고 내려가는 양을 보았더니, 그러면 그것이 영채던가. 그럴진대 지금 영채는 어떤 요리점에 앉아서 어떤 부랑한 남자와 손을 마주잡고 안기며 안으며, 한 술잔에 술을 나눠 마시며 음란한 노래와 음란한 말로 더러운 쾌락을 취하렷다. 아까 여기서 눈물을 흘리던 그 눈에 남자를 후리는 추파를 띄우고 그 슬픈 신세를 말하던 그 입으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소리를 하렷다. 혹 지금 어떤 남자에게 안기어 더러운 쾌락을 탐하지나 아니하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니 형식의 흉중에 와락 불쾌한 생각이 난다. 아까 내 앞에서 하던 모든 가련한 모양이 말끔 일시의 외식이로다. 제 신세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나와 노파를 보고 속으로는 깔깔 웃었으리로다. 아아, 가증한 계집이로다 하였다. 아아, 영채는 그만 버린 계집이 되었구나. 더럽고 썩어진 창기가 되고 말았구나. 부모를 잊고 형제를 잊고 유혹에 빠져 그만 개똥같이 더러운 몸이 되고 말았구나. 박선생의 집은 그만 멸망하고 말았구나 하였다. 형식은 머리를 들어 하염없이 방 안을 돌아보고, 책상머리에 있는 부채를 들어 훅훅 다는 얼굴을 부치며 툇마루에 나와 앉았다. 어디서 활동사진 음악대 소리가 들리고 교동 거리로 지나가는 인력거의 방울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흐트러진 생각을 수습지 못하여 좁은 마당으로 얼마 동안 거닐다가 방에 들어와 옷도 입은 채로 자리에 누웠다. 형식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형식의 눈에는 울고 앉았는 영채의 모양이 뚜렷이 보이고, 영채가 말하던 경력담이 환등 모양으로, 활동사진 모양으로 형식의 주위에 얼른얼른 보인다. 안주 박선생의 집을 떠날 때에 자기가 영채를 안고, ‘이제는 다시 못 보겠구나’ 하던 양도 보이고, 외가를 뛰어나와 개를 데리고 달밤에 혼자 도망하는 영채의 모양과 숙천 객점에서 어떤 악한에게 붙들려 가던 양이 얼른얼른 보이고, 남복을 입은 영채가 죽어 넘어진 개를 안고 새벽 외따른 길가에 앉아 우는 양도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활동사진이 뚝 끊어지고 한참이나 캄캄하였다가, 장구를 들고 부랑한 난봉들을 모시고 앉아 음탕한 얼굴로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앉았는 영채가 보이고, 또 어떤 놈과 베개를 같이 하고 누워 자는 양도 눈에 얼른얼른한다.
그러고는 또 아까 자기가 영채를 대하여 앉아서 생각하던 혼인생활이 보인다. 회당에서 성례하던 일, 즐거운 가정을 이뤘던 일, 아들과 딸을 낳았던 일이 마치 지나간 사실을 회상하는 모양으로 뚜렷하게 눈앞에 보인다.
“그만 영채가 기생이 되고 말았구나!” 하고 형식은 돌아누우며 자탄하였다. 형식은 이런 생각을 아니하리라 하고 몸을 흠칫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잠이 들리라 하고 일부러 숨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또 생각이 터져 나온다. 슬픈 신세 타령을 하며 눈물 고인 눈으로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영채의 모양이 쑥 나선다.

무정 - 01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