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051장

형식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무릎 위에 놓인 눈물에 젖은 영채의 편지를 눈이 가는 대로 여기저기 다시 보았다. 그러나 형식의 눈에는 그 편지의 글자가 자세히 보이지 않는 듯하였다. 형식은 편지를 둘둘 말아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 편지와 동봉하였던 조고마한 봉투를 떼었다. 우선과 노파의 눈물 흐르는 눈은 다시 형식의 손에 있는 조고마한 봉투로 모였다. 형식은 그 봉투 속에 무슨 무거운 것이 있음을 보고, 봉투를 거꾸로 들어 자기의 무릎 위에 쏟았다. 빨간 명주 헝겊으로 싼 길쭉한 것이 나온다. 형식은 실로 묶은 것을 끊고 그 명주 헝겊을 풀었다. 명주 헝겊 속에서 여러 해 묵은 듯한 장지 뭉텅이가 나온다. 형식은 그 뭉텅이를 들고 무엇을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그 장지 뭉텅이를 폈다. 형식은 “응!” 하고 놀라는 소리를 발한다. 우선과 노파의 눈은 그 뭉텅이로부터 형식의 얼굴로 옮았다. 그러고 형식의 뚝 부릅뜬 눈에는 새 눈물이 고임을 보았다. 우선과 노파의 눈은 다시 형식의 떨리는 손에 든 장지 조각으로 옮았다. 그 장지 조각에는 ㄱㄴㄷ과 가나다를 썼다. 아이들이 처음 언문을 배울 때에 써 가지는 것이었다. 그 글씨는 어리더라. 형식은 체면도 보지 아니하고 그 장지 조각에 이마를 비비며 소리를 내어 운다. 우선과 노파는 웬일인지 모르고 형식의 들먹들먹하는 등만 본다. 형식은 안타까운 듯이 그 종이에다 얼굴을 부비며 더욱 우는 소리를 높인다. 우선도 눈에 새로 눈물이 돌면서도 ‘형식은 어린애로다’ 하였다. 형식은 십여 년 전 생각을 한다. 형식이 처음 박진사의 집에 갔을 때에는 영채의 나이 여덟 살이었었다. 그때에 영채는『천자문(千字文)』과『동몽선습(童蒙先習)』과『계몽편(啓蒙篇)』과『무제시(無題詩)』를 읽었더라. 그러나 아직도 언문을 배우지 못하였더라. 한번은 박진사가 ‘국문을 배워야지’ 하면서 좋은 장지에 가나다를 써주었다. 그러나 어린 영채는 밖에 가지고 나가 놀다가 어디서 그 종이를 잃어버렸다. 이에 영채는 아버지의 책망이 두려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서 그때 열세 살 된 형식에게 몰래 청하였다. 그때에는 아직 형식과 영채가 말을 하지 아니하던 때라, 영채는 부끄러운 듯이 반쯤 외면하고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저, 언문 써주셔요” 하였다. 이 말을 할 때의 영채의 얼굴과 태도는 형식의 눈에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참 어여쁜 계집애로다’ 하고 형식도 부끄러운 생각이 나면서, “녜, 내일 아침에 써드리지요” 하고 오 리(五里)나 되는 종이 장사 집에 몸소 가서 장지를 사다가―이 종이가 그 종이다― 있는 정성을 다 들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넉 장이나 써버리고야 이것을 썼다. 그것을 써서 책 사이에 끼워 두고 ‘어서 아침이 왔으면’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저, 언문 써주셔요’ 하고 모로 서서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 영채의 모양이 열세 살 되었던 형식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박혔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형식은 더욱 양치와 세수를 잘하고 두루마기를 방정히 입고 그 종이―이 종이로다―를 접어 품에 품고 대문에 서서 영채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생각은 마치 사랑을 하는 남자가 사람 없는 곳에서 그 사랑하는 처녀를 기다리는 생각과 같았다. 이윽고 영채도 누가 보기를 꺼리는 듯이 사방을 돌아보며 가만가만 나오다가 형식의 곁에 와서는 너무 기쁜 듯이 얼굴이 빨개지며 형식의 허리를 꼭 쓸어안았다. 형식은 자기의 가슴에 치는 영채의 머리를 살작 만졌다. 지금 세수를 하였는지 머리에는 물이 묻었더라. 그러고는 품속에서 그 종이―이 종이로다―를 내어 영채에게 주었다. 그 종이는 형식의 가슴의 체온(體溫)으로 따뜻하더라. 영채도 그 종이의 따뜻함을 깨달았는지 한 걸음 물러서서 가만히 형식의 눈을 보더니 낯이 빨개지며 뛰어들어갔다. ‘이것이 그 종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고개를 들어 다시금 그 종이와 글자를 보았다. 그 글자가 제가끔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안주에서 지내던 일과, 자기의 그 후에 지내던 일과, 영채의 이야기와 편지와 자기의 상상과로 본 영채의 일생이 번개 모양으로 형식의 머리로 지나간다. 형식은 한번 더 입술을 물며―이것은 불식부지간에 영채에게 배운 것―그 종이를 끝까지 폈다. 그 끝에는 새로 쓴 글씨로, “이것이 이 몸이 평생에 지니고 있던 선생의 기념이로소이다” 하였다. 우선과 노파도 이 글을 보고 형식의 우는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그러고 우선은 그 종이를 형식의 손에서 당기어 한번 더 보았다. 노파도 우선과 함께 그 종이를 보았다. 형식은 다시 무릎 위에 있는 종이 뭉텅이를 풀었다. 그 속에서는 ‘황옥지환(黃玉指環)’ 한 짝과 조고마한 칼 하나가 나온다. 그 칼날이 번적할 때에 세 사람의 가슴은 뜨끔하였다. 노파는 속으로 ‘저것이 이태 전에 김윤수의 아들 앞에서 뽑던 칼이로구나’ 하였다. 형식은 그 칼을 집어 안과 밖을 보았다. 안 옆에 행서로, ‘일편심(一片心)’이라고 새겼다. 형식과 우선도 대개는 그 칼의 뜻을 짐작하였다. 형식은 다시 그 지환을 집었다. 노파는 “어째 한 짝만 있는고” 하였다. 형식은 그 지환에 아무것도 쓰지 아니하였음을 보고 지환을 쌌던 종이를 집었다. 그 종이에는 잘게 쓴 글씨로,
“이것은 평양 기생 계월화의 지환이로소이다. 계월화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으시려거든 아무러한 평양 사람에게나 물으소서. 월화가 이 몸에게 이 지환을 준 뜻은 썩어진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로소이다. 이 몸은 이제 힘껏 이 지환이 가르치는 바를 행하였나이다. 장차 이 지환을 대동강에서 원혼이 된 월화에게 돌려보내려니와 이 한 짝을 선생께 드림이 또한 무슨 뜻이 있는가 하나이다.”
하고 아까 편지의 모양으로 연월일시 죄인 박영채 읍혈백배라 하였더라.

무정 - 05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