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채는 여학생에게 끌려 황주서 내렸다. 여학생은 영채를 자기의 친구라 하여 집에 소개하고 자기와 한방에 있기로 하였다. 그 집에는 사십여 세 되는 부모와, 여학생보다 삼사 세 위 되는 오라비와, 허리 구부러진 조모가 있었다. 그 조모는 손녀를 보고 아무 말도 없이 너무 반가워서 눈물을 흘렸다. 여학생의 자친은 다정하고 현숙한 부인이다. 부친은 딸이 절하는 것을 보고도 별로 기쁜 빛도 표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고개를 돌렸다. 여학생은 그것을 보고 혼자 빙긋 웃었다. 오라비는 웃으며 누이를 맞았다. 그러고 누이의 어깨를 만지며,
“왜 오는 날을 알리지 아니했니?” 하였다. 그러고 동경에 관한 말을 물었다. 오라범댁은 부모 앞에서는 가만히 웃기만 하다가 여학생과 마주앉았을 때에는 손을 잡고 등을 만지고 하며 반기는 빛이 넘친다. 영채는 이러한 모든 광경을 보고 재미있는 가정이다 하였다. 그러고 없어진 집 생각이 났다.
그날 저녁에는 부친을 빼어 놓고 온 가족이 모여앉아서 밀국수를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하였다. 영채는 여학생의 곁에 잠자코 가만히 앉았다. 오라비는 영채에게 대하여 어려운 생각이 나는지 한참 이야기하다가 밖으로 나가고 여자들만 모여앉았다. 여학생은 쾌활하게 조모와 모친과 형수(오라범댁)를 번갈아 보아 가며, 동경서 일 년 동안 지내던 이야기를 한다. 조모는 이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 중에도 형수가 제일 재미있게 듣는다. 모친은 딸의 이야기는 듣는지 마는지 먹을 것만 주선하며 이따금 딸의 이야기에는 상관도 없는 질문을 한다. 딸이, “어머닌 남의 말은 아니 듣고” 하면, “왜 안 들어. 어서 해라” 하기는 하면서도 또 딴소리를 하여서는 젊은 사람들을 웃긴다. 영채도 남을 따라서 웃었다. 실상 모친은 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조모는 더구나 알아듣지 못한다.) 조모는 웃기도 그치고 하품을 시작한다. 형수와 영채만이 턱을 받치고 재미나게 듣는다. 얼마 있다가 모친도 졸린지 눈이 껌벅이며 눈물이 흐른다. (모친이) 일어나 베개를 내려 조모께 드리며,
“어머님께서는 주무십시오. 그 애들 지껄이는 것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하고 자기도 팔을 베고 눕는다. 두 노인은 잠이 들고 세 청년만 늦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셋은 즐거웠다. 영채도 형수와 친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에는 셋이 한자리에서 가지런히 누워 잤다. 영채는 늦도록 잠이 아니 들었으나 마침내 잠이 들어서 꿈에 월화를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혼자 웃었다. 죽으러 가던 몸이, 어젯저녁에 죽었을 몸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생각하니 우습다. 그러나 자기의 전도는 어찌 될는지 걱정이었다.
여학생의 이름은 병욱이다. 자기 말을 듣건대 처음 이름은 병옥이었으나 너무 부드럽고 너무 여성적이므로 병목이라고 고쳤다가, 그것은 또 너무 억세고 남성적이므로 그 중간을 잡아 병욱이라고 지은 것이라 하며 영채더러 하루는,
“병욱이라면 쓸쓸하지요. 나는 옛날 생각과 같이 여자는 그저 얌전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것은 싫어요. 그러나 남자와 같이 억세고 뻑뻑한 것도 싫어요. 그 중간이 정말 (여자에게) 합당한 줄 압니다” 하고 웃으며, “영채, 영채…… 어여쁜 이름이외다. (그러나 과히 여성적은 아니외다.)”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집에서는 병욱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병옥이라고 부른다. ‘병옥아’ 해도 대답은 한다.
병욱은 영채를 매우 재주 있고, 깨닫기 잘하고, 공부 잘한 여자로 알았다. 처음에는 자기의 말을 못 알아들을 듯하여 아무쪼록 알아듣기 쉬운 말을 골라 하였으나, 이제는 거의 평등으로 대접한다. 영채는 무론 병욱을 헤아릴 수 없이 이상한 지식과 생각을 많이 가진 사람으로 안다. 그러므로 병욱의 입으로 나오는 말이면 무엇이나 주의하여 듣고 힘써 해석해 본다. 그래서 이삼 일 내에 병욱의 생각을 대강 짐작하게 되었고, 또 병욱의 생각이 자기가 지금토록 하여 오던 생각과는 거의 정반대됨을 깨달았다. 그러고 그 생각이 도리어 합리하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지금은 차 중에서 병욱이가 하던 말을 잘 깨달아 알게 되었다.
병욱과 영채는 깊이 정이 들었다. 둘이 마주앉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에 취하게 되었다. 영채는 병욱에게 새로운 지식과 서양식 감정을 맛보고, 병욱은 영채에게 옛날 지식과 동양식 감정을 맛보았다. 병욱은 낡은 것을 모두 싫어하였었다. 그러나 영채의 잘 이해한 사상을 접하매 옛날 사상에는(사상에도) 여러 가지 맛있는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소학이며 열녀전이며, 한시 한문을 배우고 싶은 생각까지도 나게 되었다. 집에서 먼지 오르던 {고문진보} 같은 것을 내어서 이것저것 영채에게 배우기도 하고, 배운 것을 외우기도 하였다. ‘참 재미있다’ 하고 어린애같이 기뻐하면서 소리를 내어 읊기도 하였다. 부친은 병욱이가 시 읊는 소리를 듣고 칭찬을 하는지 조롱을 하는지 모르게 ‘흥, 흥’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