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112장

병욱은 수건으로 영채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얘, 다른 손님들이 이상하게 여기겠다. 울지 말아라…… 이 세상이 왜 행복을 아니 주어…… 아니 주거든 내라지. 내라도 아니 주거든 억지로 빼앗지. 빼앗아도 아니 주거든 원수라도 갚지! 또 생각을 해봐라. 이 세상에 너와 같이 설움을 당하는 사람이 너뿐이겠니? 더구나 우리나라에는 그런 불쌍한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 안 된 사회제도를 고쳐서 우리 자손들이야 행복을 얻고 살게 해야지……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느냐. 그런데 만일 네가 제 고생을 못 이겨서 죽고 만다 하면 이것은 네가 우리 자손에게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많이 하자…… 자, 울지 말고 딸기나 내 먹자” 하고 일어서서 등으로 결은 하얀 두룽이(종다래끼)를 내린다.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지―― 왜 못 해? 하느님이 큰 일꾼을 만들 양으로 네게 초년 고락을 주었구나…… 자, 우리 둘이 아니 있니? 그까짓 이형식 같은 사람은 잊어버리고 우리 둘이 서로 의지하고 살자…… 자, 옜다 먹자” 하고 빨갛게 익은 딸기를 내어놓고 먼저 자기가 하나를 먹는다. 입에 넣고 씹으니 하얀 이빨에 핏빛 같은 물이 든다. 이것은 어저께 아침 곁에 병국의 부인과 셋이 그 목화밭에 가서 송별연삼아 수박을 따먹으면서 따모은 것이라. 두 사람의 눈앞에는 황주 병욱의 집 광경이 얼른 지나간다.
영채도 울어야 쓸데없음을 알고 눈물을 거둔다. 또 병욱의 말에는 정이 있고 힘이 있고 이치가 있어서 반가우면서도 자기를 내려누르는 듯한 힘이 있다. 가슴이 터져 오게 슬프다가도 병욱의 말을 한마디 들으면 그만 스르르 풀리고 만다. 영채는 병욱이가 남자같이 활발한 듯하면서도 속에는 뜨겁고 예민한 정이 있음과, 또 자기를 위로할 때에는 진정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이 되어서 하는 줄을 잘 안다. 만일 영채가 자살을 하려고 물가에 섰거나 칼을 들고 섰다가라도 병욱의 말소리만 들리면 얼른 “언니” 하고 따라갈 것이다. 영채가 보기에 병욱은 언니라기보다 어머니라 함이 적당할 듯하였다.
그러나 이십 년 생활이 한데 뭉쳐 된 영채의 슬픔이 다만 병욱의 그 말만으로는 아주 다 스러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더 자기의 고집을 부리는 것은 친절한 병욱에게 대하여 미안한 듯하여 영채도 딸기를 먹는다. 빨간 딸기가 두 처녀의 고운 입술로 들어가서는 하얀 이빨을 빨갛게 물들이곤 하다. 차창에는 비가 뿌려서 눈물 같은 물방울이 떼그루 굴러내리다가는 다른 물방울과 한데 합하여 흘러내린다. 차가 흔들리는 대로 떨리는 전등 가에는 하루살이 등속이 떼를 지어 모여 들어간다. 두 처녀의 입술과 손가락 끝이 딸깃물에 불그레하여졌을 때에 형식이가, “영채 씨!” 하고 두 사람 앞에 와 섰다.
형식은 얼마 전에 이 차실에 들어와서 바로 영채의 곁으로 오려다가 영채가 우는 듯한 모양을 보고 영채 앉은 걸상에서 서넛 건너 있는 빈 걸상에 앉아서 가만히 두 사람의 말을 엿들었다. 찻바퀴 소리에 자세히 들리지는 아니하나 이따금 이따금 한 마디씩 두 마디씩 들리는 말을 주워 모으면 대강 뜻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형식은 영채에게 대하여 죄송한 마음과 자기에게 대하여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영채에게 정성껏 사죄를 하리라 하였다.
영채와 선형은(병욱은) 놀라서 일어선다. 두 사람을(사람은) 일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영채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형식은 고개를 숙였다. 병욱이가 오직 고개를 들고 형식에게,
“앉으시오” 한다. 형식은 앉는다.
“얘, 앉으려무나” 하는 병욱의 말에 영채도 앉는다. 그러나 고개는 여전히 돌렸다. 형식은 마치 무슨 무서운 것이나 대한 듯이 몸에 소름이 쭉 끼친다. 영채의 뒷모양이 자기를 내려누르고 위협하는 듯하다. 대동강에 빠져 죽은 영채의 넋이 지금 자기 앞에 나서서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금시에 영채가 휙 돌아서며 무서운 얼굴로 자기를 흘겨보고 입에 가득한 뜨거운 피를 자기에게다가 확 뿌리며 “이 무정한 놈아, 영원히 저주를 받아라” 하고 달겨들 것 같다. 왜 그때에 평양 갔던 길에 더 수탐을 하여 보지 아니하였던가. 왜 그때 우선에게서 돈 오 원을 꾸어 가지고 즉시 평양으로 내려가지를 아니하였던가 하여도 본다. 이제 영채가 고개를 돌리면 어찌하나. 아니 왔더면 좋겠다 하여도 본다. 이때에,
“자, 딸기 잡수십시오” 하고 병욱이가 딸기 그릇을 내어놓으며,
“얘, 영채야” 하고 자기의 발로 영채의 발을 꼭 누른다. 영채는 가만히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형식은 보지 아니한다.
“영채 씨, 용서해 줍시오. 무에라고 할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대하여서나 영채 씨께 대하여서나 큰 죄인이외다. 무슨 책망을 하시든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제가 철없이 찾아가서 공연한 걱정을 끼쳤습니다. 또 죽지도 못하는 것을 죽는다고 해서 얼마나 노심을 하셨습니까” 하고 고개를 숙인다.
병욱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