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 125장

“응, 지금 우리는 장차 무엇으로 조선 사람을 구제할까 하고 각각 제 목적을 말하려던 중일세.”
“녜, 그러면 저도 좀 듣지요!”
처녀들은 그의 대팻밥 모자와 말하는 모양이 우스워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꿀덕 참는다. 영채 하나만 어찌할 줄을 몰라서 얼굴을 잠깐 붉히나 우선은 영채를 보면서도 모르는 체한다.
“어느 분 차례입니까”
하는 우선의 말에,
“내 차례인가 보에.”
“응, 그러면 말하게”
하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들을 준비를 한다. 병욱은 영채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선형은 웃음을 참느라고 살짝 고개를 돌린다.
“나는 교육가가 될랍니다. 그러고 전문으로는 생물학(生物學)을 연구할랍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중에는 생물학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형식도 무론 생물학이란 참뜻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연과학(自然科學)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가장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하여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
형식은 병욱을 향하여,
“무론 음악이시겠지요?”
“녜― 저는 음악입니다.”
“또 영채 씨는?”
영채는 말없이 병욱을 본다. 병욱은 어서 말해라 하고 눈짓을 한다.
“저도 음악입니다.”
“선형 씨는?”
하는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서 형식은 가만히 앉았다. 여러 사람은 웃었다. 선형은 얼굴을 붉혔다.
“선형 씨는 무엇이오…… 무론 교육이겠지.”
하고 병욱이가 웃는다. 모두 웃는다. 형식도 고개를 수그렸다. 선형도 병욱이가 첫마디에 “녜, 저는 음악이외다” 하고 활발히 대답하는 것이 부러웠다. 그래서,
“저는 수학을 배울랍니다.”
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서 말하였다. 학교에서 수학을 잘한다고 선생에게 칭찬받던 생각이 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수학이 좋은 것인 줄은 알았으나 수학과 인생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모른다.
“그 담에는 자네 차례일세.”
“나는 붓이나 들지!”
한참 말이 없었다. 제가끔 제 장래를 그려 본다. 그러고 그 장래의 귀착점은 다 같았다.
우선이가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형식이가,
“왜, 오늘은 그렇게 점잖아졌나?”
하고 웃는다. 우선이가 고개를 들더니,
“언제인가 자네가 날더러 인생은 장난이 아니라고, 나는 인생을 희롱으로 본다고 그랬지? 마지메(진지)하게 생각지를 않는다고?”
“글쎄, 그런 일이 있던가.”
“과연 그게 옳은 말일세. 나는 지금까지 인생을 장난으로 보아 왔네. 내가 술을 많이 먹는 것이라든지…… 또 되는 대로 노는 것이 확실히 인생을 장난으로 여기던 증거지. 나는 도리어 자네가 너무 마지메한 것을 속이 좁다고 비웃어 왔지마는 요컨대,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어!”
여기까지 와서는 형식도 우선의 말이 오늘은 농담이 아닌 것을 깨닫고 정색하고 우선의 얼굴을 본다. 세 처녀도 정색하고 듣는다. 과연 우선의 얼굴에는 무슨 결심의 빛이 보인다. 우선은 말을 이어,
“오늘 와서 깨달았네. 오늘 정거장에서 음악회 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네. 나는 차 타고 지나오면서 메기슭에 사람들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도 나기는 났지마는 그 꾀죄하고 섰는 양이 우스워서 웃기부터 하였네. 나는 어떻게 하면 저들을 건지나 하는 생각도 아니하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도 아니 흘렸네. 그러고 차를 내리면 얼른 구경을 가리라, 가서 시나 한 수 지으리라, 하고 울기는커녕 웃으면서 내려 가지고, 그 말을 들을 때에 나는 가슴이 뜨끔하였네…… 더구나 젊은 여자가…….”
하고 감격한 듯이 말을 맺지 못한다. 듣던 사람들도 묵묵하다. 우선은 말을 이어,
“나도 오늘 이때, 이 땅 사람이 되었네. 힘껏, 정성껏 붓대를 둘러서 조곰이라도 사회에 공헌함이 있으려 하네. 이제 한 시간이 못 하여 자네와 작별을 하면 아마 사오 년 되어야 만나게 되겠네그려. 멀리 간 뒤에라도 내가 이전 신우선이가 아닌 줄로 알고 있게. 나는 자네와 떠나기 전에 이 말을 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아네.”
하고 손을 내어밀어 형식의 손을 잡는다. 형식도 꼭 우선의 손을 잡아 흔들며,
“기쁜 말일세. 무론 자네가 언제인들 잘못한 일이 있었겠나마는 그처럼 새 결심 한 것이 무한히 기쁘이.”
우선은 한참 주저하다가,
“영채 씨, 이전 버릇없던 것은 다 용서합시오! 저도 이제부터 새사람이 될랍니다. 부대 공부 잘하셔서 큰일하십시오.”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영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선형은 이제야 형식에게 영채의 말이 모두 참인 줄을 깨달았다. 그러고 가만히 영채의 손을 잡고 속으로 ‘형님 잘못했습니다’ 하였다. 영채는 선형의 손을 마주 쥐며 더욱 눈물이 쏟아진다. 형식도 울었다. 병욱도 울었다. 마침내 모두 울었다. 비 갠 뒤 맑은 바람이 창 밖에 늘어진 수양버들가지를 스쳐 방 안에 불어 들어와 다섯 사람의 열한 얼굴을 식힌다. 잠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