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이가 영채한테 간 지가 두 시간이나 세 시간이나 된 것 같다. 퍽도 오래 있는 것 같다. 오래 있는 것 같을수록 선형의 마음이 더욱 산란하였다.
선형은 지금까지 형식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하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형식이가 퍽 자기를 사랑하여 주니 자기도 힘껏 형식을 사랑하여 주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은 있었다. 아내 되어서는 지아비를 사랑하라 하였고, 부모께서는 자기더러 이형식의 아내가 되어라 하였으니 자기는 불가불 형식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러나 형식이가 자기더러 요구하는 그러한 사랑, 손을 잡고 허리를 안고 입을 맞추려 하는 사랑은 없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다른 여자가 형식을 안아 준다 하면 자기의 생각이 어떠할까 하는 것은 생각하여 본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선형은 지금 자기가 가진 생각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선형도 시기라든지 질투라는 말은 안다. 그러나 시기나 질투는 큰 죄악이라, 자기와 같은 예수도 잘 믿고 교육도 잘 받은 얌전한 아가씨의 가질 것은 아니라 한다.
조물은 각 사람에게 사람으로 배워야만 할 모든 것을 다 가르친다. 그리하되 사람들이 학교에서 하는 것과 같이 책이나 말로써 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실험으로써 한다. 조물은 말할 줄을 모르고 오직 실행할 줄만 아니까 그러한가 보다. 선형의 인생의 학과는 이제부터 차차 중등과에 들려 한다. 사랑을 배우고 질투를 배우고 분노하기와 미워하기와 슬퍼하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사람이란 죽는 날까지 이것을 배우는 것이니까 선형이가 졸업하려면 아직 멀었다. 이 점으로 보면 영채나 형식은 선형보다 훨씬 상급생이다. 그러고 병욱은 사람들이 조물을 흉내내어, 또는 조물의 생각을 도적질하여 만들어 놓은 문학이라든지 예술이라든지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퍽 많이 배웠다.
사람이란 이러한 과정을 많이 배우면 많이 배울수록 어른이 되어 간다. 즉 천진난만한 어린애의 아리따운 태도가 스러지고 꾀도 있고, 힘도 있고, 고집도 있고, 뜻도 있고, 거짓말도 곧잘 하거니와 옳은 말도 힘있게 하는 소위 어른이 되어 간다. 정신의 내용이 더욱 풍부하여지고 더욱 복잡하여진다. 일언이폐지하고 사람이 되는 것이라.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선형은 아직 천진난만한, 엊그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린애다. 오늘에야 처음 사람의 맛을 보았다. 사랑의 불길에, 질투의 물결에 비로소 쓴 것도 같도 단 것도 같은 인생의 맛을 보았다. 옛말에 마마는 백골이라도 한 번은 한다는 셈으로 사람 되고는 한번은 반드시 이 세례를 받는다. 아니 받고 지났으면 게서 더한 행복도 없을 듯하건마는, 그렇거든 사람으로 아니 나는 것이 좋다. 다나 쓰나 면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두를 놓으면 천연두를 벗어난다.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앓더라도 경하게 앓는다. 그러므로 근년에 와서는 누구든지 우두를 놓으며 그래서 별로 곰보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정신에도 마마가 있으니까 정신에도 천연두가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든지 질투라든지 실망, 낙담, 슬픔, 궤휼, 간사, 흉악, 음란, 행복, 기쁨, 성공 등 인생의 만만 현상은 다 일종 정신적 마마라. 소위 약은 부모들은 사랑하는 자녀의 괴로워하는 양을 차마 보지 못하여 아무쪼록 그네로 하여금 일생에 이 마마를 겪지 않도록 하려 하나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막지 못할 것이다. 야매한 사람들이 마마에 귀신이 있는 줄로 믿는 것은 잘못이어니와 이 정신적 마마야말로 귀신이 있어서, 지키는 부모 몰래 그네의 사랑하는 자녀의 정신 속에 숨어 들어가는 것이라. 그러므로 자녀에게 인생의 모든 무섭고 더러운 방면을 감추려 함은 마치 공기 중에는 여러 가지 독균이 있다 하여 자녀들을 방 안에 가두어 두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바깥 독균 많은 공기에 익지 못한 자녀의 내장은 독균이 들어가자마자 곧 열이 나고 설사가 나서 죽어 버린다. 그러나 평생에 바깥 공기에 익어서, 내장에 독균을 대항할 만한 힘을 기르면 여간한 독균이 들어오더라도 무섭지를 아니하다. 한번 우두로 앓은 사람은 천연두균을 저항하는 힘이 있는 것과 같다.
선형은 지금껏 방 안에 갇혀 있었다. 그는 공기 중에 독균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고 그는 우두도 놓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지금 질투라는 독균이 들어갔다. 사랑이라는 독균이 들어갔다. 그는 지금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가 만일 종교나 문학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대강 배워 사랑이 무엇이며 질투가 무엇인지를 알았던들 이 경우에 있어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언마는 선형은 처음 이렇게 무서운 변을 당하였다.
선형은 얼마 울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 지금 지나간 자기의 심리(心理)를 돌아보고 깜짝 놀라며 진저리를 쳤다. 선형의 눈은 둥글어진다.
‘내가 어찌 되었는가’ 하고 한참 숨을 멈춘다. 첫번 지내 보는 그 아픈 경험이 마치 캄캄한 밤과 같은 무서움을 준다. ‘이게 무엇인가’ 하고 오싹오싹한 소름이 두어 번 전신으로 쪽쪽 지나간다. 그러다가 멀거니 차실을 돌아보면서,
‘퍽도 오래 있네’ 한다.



